[클래식 ABC] "맞을래 잘할래" 지휘봉을 채찍처럼 든 마에스트로

입력 : 2008.10.23 06:32

'강 마에'의 원조… 폭군 지휘자 토스카니니

‘강 마에’같은 폭군형 지휘자의 원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을유문화사 제공
분명 활과 현이 맞닿지 않았는데도 선율이 흐르고, 매번 리허설을 하는데도 변화 없이 똑같은 음악이 나오는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본격 음악 드라마라고 하기엔 낙제점의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 끌고 있는 것은 역시 주인공 '강 마에(마에스트로의 줄임말)'의 화려한 어록 덕분이겠지요.

도도하기 그지없는 드라마 속 지휘자는 나이 많은 여성 첼로 단원에게 "아줌마. 지금이라도 주제 파악을 해볼까요. 따라 해보세요. 똥덩어리"라고 면박을 주고, 단원들을 향해서는 "너희들은 내 악기야. 난 오케스트라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거고, 너희들은 그 부속품"이라고 단언합니다. 탤런트 김명민씨의 열연을 보고 있노라면, '현실에도 저런 지휘자가 존재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물론 존재합니다. '폭군형 마에스트로'로 악명 높은 대표적 지휘자가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Toscanini·1867~1957)입니다. 푸치니의 《라 보엠》과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등 숱한 이탈리아 걸작 오페라를 직접 초연했으며, 20세기 전반의 음악계를 베를린 필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양분했던 거장입니다.

어느 날 리허설에서 오케스트라 단원 하나가 독주(獨奏) 대목을 마치자, 토스카니니는 그 단원에게 몇 년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지 시시콜콜히 묻고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날이야말로 음악에는 재난의 날이었어! 자,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1919년에는 제2바이올린 주자의 연주가 맘에 들지 않자 지휘봉으로 비스듬히 단원의 활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활이 부러지면서 반동으로 튀어올라 단원의 이마를 때렸다고 하지요. "마에스트로가 아니라 깡패"라는 단원의 고함 소리와 함께 이 사건은 소송으로 번졌고, 토스카니니는 연주자의 치료비를 물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박자가 느린 성악가들을 향해 "그들은 모두 돼지들이야"라고 고함을 질러댔던 이 열혈 지휘자는 '원조 강 마에'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 마에' 같은 지휘자는 오히려 소수파나 희귀종(稀貴種)에 속하는 편입니다. 험상궂은 힐난이나 매서운 질책보다는, 웃음이 넘치는 가운데 대화와 토론이 오가는 민주적 리더십이 오케스트라에도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요.

현재 베를린 필을 이끌고 있는 사이먼 래틀(Rattle)이나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를 세계 초연했던 지휘자 켄트 나가노(Nagano),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미국 정상급 악단으로 끌어올린 마이클 틸슨 토머스(Tilson Thomas) 등이 대표적입니다. 오케스트라에도 '민주화 바람'은 거센 편입니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비롯할까요. 예전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 해로'하는 부부 관계와 흡사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무려 44년간 맡았던 지휘자 유진 오먼디(Ormandy),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24년간 이끌었던 조지 셸(Szell), 시카고 심포니를 22년간 책임졌던 게오르그 솔티(Solti)가 대표적입니다. 장기 집권이야말로 지휘자의 독재 권력과 카리스마를 낳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휘자는 지휘자대로, 오케스트라도 악단대로 '딴살림' 궁리에 바쁩니다.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Levine)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과 보스턴 심포니를 이끌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고, 게르기예프(Gergiev)는 러시아의 마린스키 극장과 영국의 런던 심포니를 숨가쁘게 오갑니다. 오케스트라도 경영 실적이나 음악적 평가가 조금이라도 악화되면, 불신임과 재계약 불가 같은 방법으로 지휘자를 갈아치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전 음악계가 권위적이되 책임감 넘쳤던 아버지 세대와 흡사하다면, 지금은 다정하지만 이혼율 높은 우리 세대와도 닮아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가끔은 '강 마에' 같은 지휘자들이 거꾸로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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