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홍등' vs 발레 '홍등'

입력 : 2008.10.17 09:17

비극을 말하는 두 가지 방법

사진=성남아트센터
사진=성남아트센터

무대에서의 비극, 장치를 극대화할 것

1990년대 후반부터 장이모우의 활약은 영화를 넘어서 전방위 문화 활동으로 확장된다. 활동 영역의 확장과 함께 연출 스타일 또한 변화했는데, 최근작인 '영웅', '연인', '황후화' 등에서는 장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출연진, 그리고 장면장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미장센과 선명한 색채감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부각되고 있다. 덕분에 근래의 영화들이 너무 스펙터클과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았지만, 스크린이 아닌 무대 작업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색채와 이미지의 향연이 위력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미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대규모 무대 연출력을 선보인 바 있는 장이모우는 2001년, 중국 국립발레단의 의뢰로 자신의 영화 '홍등'을 무대화 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홍등'은 영화 자체로도 시간과 공간이 압축적인데다 극중 ‘홍등’의 선명한 이미지 때문에 무대화하기에 매우 적합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장이모우는 이를 그대로 무대에 옮기는데 만족하지 않고, 무대 예술에 걸맞는 새로운 언어와 표현양식을 고민함으로써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    

일단 대사가 없는 발레의 특성을 고려해 서사성보다는 움직임에 극의 중심을 실었다. 드라마는 최대한 단순화 시키고, 복잡한 인물 관계도 간략하게 줄였다. 원작에서 각기 다른 아픔과 욕망을 품고 등장했던 세 부인과 주인공, 그리고 하녀의 복잡한 관계는 두 젊은 부인으로 간소화했고 대신 남자 인물들의 비중을 키웠다. 영화에서 뒷모습과 목소리로만 등장하며 상징적으로 처리되었던 남편이 무대 전면에 서고, 원작에는 없던 경극 배우가 주인공의 옛 연인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 관계의 변화는 단순해진 서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2인무? 3인무? 군무 등의 춤 형식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서사’가 아니라 ‘춤’으로 이 작품을 풀어나가겠다는 연출가의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덕분에 주인공이 남편 혹은 경극 배우와 추는 이인무가 극을 이끌어 가고, 두 부인과 남편의 욕망과 질투가 뒤섞인 3인무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화해와 용서의 3인무 등이 도드라진다. 또한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가신과 시녀들, 그리고 경극 배우들은 무대를 압도하는 대규모의 군무를 통해 대극장 무대를 효과적으로 채워간다. 

인물군의 변화에 따라 작품의 시선 역시 달라진다. 영화가 여주인공 송련을 통해 지식인 여성이 봉건사회의 벽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그 속에서 이성이 어떻게 길들여지고 망가지는지 그 붕괴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발레는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적? 감정적인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내는 데 주력한다. 본래 영화에서 밀회를 나누다 들통이 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셋째 부인이고 주인공 송련은 이를 목격하고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만, 발레 '홍등'에서는 극적인 파토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인공이 바로 그 밀회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었고, 두 연인은 자신들을 밀고한 둘째부인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감옥에서 추는 세 사람의 춤은 거대한 사회악 앞에서 시기나 질투, 사랑 등 개인의 감정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강렬한 춤 언어로 보여주며 비판적인 시선을 이끌어낸다.

사진=성남아트센터
사진=성남아트센터

스크린과 무대예술, 이렇게 다르다

인물의 심리 대신 인상적인 장면과 이미지로 극을 이어가기 위해 장이모우는 무엇보다 화면 구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발레 '홍등'에서는 홍등의 점등, 멸등에 따른 인물의 미묘한 심리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무대 전면을 가득 채운 홍등은 무대 전체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을 보여주는 동시에 무대에 압도적인 색채감을 부여한다. 또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경극공연은 배우와 주인공의 재회를 만드는 계기이자 동시에 화려한 전통 연희를 무대 위에 펼쳐놓는 극적장치로 기능한다.

경극의 현란한 음악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무대에 중국 고유의 특색을 입히면서 동시에 전통 춤과 예능에 정통한 중국발레단의 장점을 과시한다. 마작 장면 또한 탁자를 둘러싼 역동적인 군무와 패를 섞어 돌리는 경쾌한 소리로 인상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한편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던 궁리가 무심하면서도 섬세한 표정으로 인물의 내면을 그려냈다면, 발레 '홍등'의 무용수들은 절망과 사랑, 애틋함 등의 감정을 온몸으로 풍부하게 표현한다. 절제의 미가 돋보였던 영화에 비해 발레 '홍등'은 무용수들의 크고 강렬한 동작을 통해 격정적인 감정을 무대 가득 흘러넘치게 만드는데, 이는 무용수들의 춤만이 아니라 장면 연출에서도 도드라진다.

특히 영화에서는 암시만 남겼던 주인공의 첫날밤, 그리고 살인과 같은 자극적인 장면을 발레에서는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정서적인 충격과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첫날밤을 그림자극을 통해 보여준 것이나 마지막 처형 장면을 흰 스크린과 핏자국으로 형상화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묵직한 몽둥이 소리와 선연한 핏자국, 그 앞에서 쓰러지는 세 연인과 흩날리는 눈발은 아름다움과 비극성을 감각적으로 극대화시킨다. 가장 직접적인 무대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무용예술의 장단점을 인식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민한 연출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연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든, 목격자로서 미쳐가든 간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다는 점에서 영화 '홍등'과 발레 '홍등'의 비극성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장이모우는 스크린과 무대에서 이 비극을 어떻게 그려야 가장 효과적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영화 '홍등'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소리 없이 이루어진 비극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발레 '홍등'은 이를 무대 전면으로 끄집어내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라는 매개체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TV, 영화와 달리 무대 예술에서는 연출자와 출연자가 직접 감정과 정서를 끄집어내어 관객 눈앞에 들이대야 하고, 따라서 당연히 표현 양식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당연한 말이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스크린과 무대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유행처럼 번져가면서도 종종 실패로 끝나고 마는 우리 공연계를 생각해볼 때, 같은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간 장이모우의 고민과 성과는 분명 들여다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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