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은세계'
이 연극은 극중극(劇中劇)을 품고 있다. 극중극은 1908년 원각사(서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던 서양식 극장)에서 신연극 《은세계》 초연을 준비하는 광대들을 따라가고, 이인직과 중년 부인이 그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형식이다. 올해는 《은세계》를 기점으로 한국 연극 100주년. 극중극은 100년 전처럼 창극(唱劇)으로 살려냈다.
원래 《은세계》는 1880년대 원주 감사(수구파)의 폭정에 숨진 최병도(崔秉陶·개화파)라는 실존 인물이 주인공이고, 강원도에서 불려지던 '최병두 타령'을 바탕으로 한 그 사건의 회고다. 이번 공연은 그것의 복원이나 재현이 아니었다. 작가(배삼식)는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 하는 광대들의 고민은 똑같다는 데서 다시 출발했다. 《은세계》를 연습하는 광대들은 "시절이 변하면 소리도 변해야 한다"는 주장을 놓고 두 패로 갈라졌고, "요즘 시속(時俗)이 소리보다 얼굴 쳐주고, 듣는 거보다 보는 거니까, 니가 국창(國唱)이다" 같은 대사에는 객석이 웃음바다가 됐다.
모든 망설임은 둥글다. 둥글 원(圓)에 깨우칠 각(覺)자를 쓰던 원각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광대들의 망설임과 갈등, 공연 중단의 위기까지 여러 굽이를 만난다. 연출(손진책)은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그 과정을 보여준다. 광대들은 결국 직선으로 돌파해 공연을 올리고야 만다. "복판을 못 때리면 변죽이라도 울려야 한다"는 정신이 절절했다.
대사는 소리로 날아올랐다. 속된 표현인 "염~병!"에도 가락이 숨어 있었다. 북, 대금, 아쟁의 국악 연주는 악보 없이 배우들의 창에 즉흥적으로 달라붙었다. 유머러스하고 현대와도 통하는 장면이 많아 '늙은 연극'이라는 선입견은 곧 지워졌다. 김창환 명창이자 극중극에서는 최병도 역을 맡은 왕기석은 좋은 배우였다. 연기와 소리가 고르게 깊었다.
이인직과 부인을 세워두고 현장을 관찰하게 하는 형식의 효과는 잘 살아나지 않았다. "난 늦어. 항상 늦어. 아무리 서둘러도 놓쳐버렸어"라는 이인직의 푸념은 사변적이고, 부인도 명료하지 않다. 어쩌면 '친일파 이인직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컸을 수도 있다. 100년 만에 공연된 《은세계》는 그런 구김살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연극이었다. 진짜와 헛것 사이에서, 방랑하는 광대들의 삶은 여전히 거칠다.
▶19일까지 정동극장. (02)751-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