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지 얼굴의 피아니스트

입력 : 2008.10.09 03:10

교육자·이론가·즉흥연주자·정통연주자… 로버트 레빈 내한 연주
스무 살 때 커티스음악원 교수 "연주는 암송이 아니라 대화"

즉흥 연주의 달인으로 평가받는 로버트 레빈 미국 하버드대 교수.“ 연주는 기계적인 암송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화”라고 했다. /크레디아 제공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즉흥 연주자…. 로버트 레빈(Levin·60) 하버드대 교수는 이름 앞에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만능 음악가'다. 고교생 시절에 당대 최고의 음악 교육자인 나디아 불랑제(Boulanger)를 사사했고, 갓 스무 살 하버드대 졸업과 동시에 미국 명문 커티스 음악원의 이론과 주임 교수로 임용됐다. 왕년 미 인기 드라마 '천재 소년 두기'의 주인공을 닮은 레빈의 '네 가지 얼굴'에 대해 내한 연주회를 앞두고 전화로 물었다.

①교육자

1968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레빈에게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교수 임용 초대장이 날아왔다. 당시에는 레빈 자신도 "가까운 친구가 장난을 쳤겠지"라고 여겼다고 했다. "아름다운 편지지에 우아한 필체로 써 있어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죠. 당시 커티스 음악원장이던 명(名)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Serkin)에게 용기 내어 전화를 걸었고, 그 뒤에 필라델피아에서 만났어요. 제르킨은 4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눈 뒤 반짝이는 눈으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이야말로 이론과를 맡을 적임자라고 본다'고 말했어요. 당시 학생 절반은 저보다 나이가 많았고, 임용 뒤에는 교수 5명을 직접 선발하기도 했어요."

②즉흥 연주자

재즈에선 즉흥 연주가 일상적이지만, 엄격하게 악보에 충실한 것이 미덕으로 정착한 클래식 음악에선 사실상 퇴화한 지 오래다. 하지만 레빈은 청중이 제시한 주제를 바탕으로 그 자리에서 음악을 펼쳐 보이는 즉흥 연주의 '달인'이다. 이달 내한 연주에서도 중간 휴식 시간에 두 마디 가량의 멜로디가 적힌 쪽지를 관객들이 적어내면 추첨을 거쳐 2부 첫 순서에서 10~15분 가량 연주할 예정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연주하다 보면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연주는 기계적인 '암송'이 아니라 능동적인 '대화'를 뜻한다"고 말했다.

③음악 이론가

레빈은 모차르트의 유작인 〈레퀴엠〉을 비롯해 미완성 소나타 등 많은 작품을 자신의 버전으로 완성했으며, 바흐의 종교 칸타타 가운데 유실된 부분을 재구성하는 작업에도 참가했다. 그는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는 일은 때때로 모양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낱말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모차르트가 천국에서 제가 작업한 판본을 보고서 화만 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물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천국에서 모차르트를 만나겠지만…(웃음)."

④연주자

하버드 대학 교정 인근의 150년 된 고택(古宅)인 레빈의 집에는 건반 악기가 모두 7대 놓여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 3대를 비롯해 피아노의 전신(前身)인 하프시코드 1대와 18~19세기의 포르테피아노 복제품 3대까지 갖추고 있다. 레빈은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의 전문가인 동시에 쇼스타코비치와 힌데미트, 엘리엇 카터 등 현대 음악에도 활짝 문을 열어놓은 '전(全)방위 연주자'다. 그는 "몇몇 한정된 음악만 평생 연주하고 사는 것은 모험이나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 것과 같다. 어차피 삶이 모험이라면 왜 굳이 피하려 드는가?"라며 웃었다.

▶로버트 레빈 피아노 리사이틀, 10월 31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 (02)751-9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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