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주말특집] 연극배우 서주희 "연극으로 대화하고 싶다"

입력 : 2008.09.06 10:17   |   수정 : 2008.09.06 14:48

스타를 넘어서다 <제8편> 서주희편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소통을 꿈꾼다. 대한민국 연극계 최고 스타라 불리는 그녀는 무대에서 관객과 교감하기를 즐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서주희는 내 친구다. 우리는 나고 자란 곳도 다르고 나이 차도 있다. 알고 지낸 지는 겨우 사흘 째다. 그래도 서주희는 말했다. “서로 교감할 수 있으면 그게 친구 아냐?” 직설적인 질문에 수줍은 웃음으로 답했다. 누가 인정하든 말든 그녀를 내 친구 삼기로 했다. 아래는 대한민국 연극계 최고 스타를 소개하는 글이다. 기대하시라! 42살 중년의 나이에도 소녀 감성을 고이 간직한 어느 연극배우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잘자요, 엄마


지난 4일 대학로의 작은 무대엔 어김없이 불이 켜졌다. 강렬한 조명이 소담스런 무대를 비췄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떠올랐다. 밝은 곳엔 배우가, 어두운 곳엔 관객이 자리 잡으리라. 짧은 오프닝 음악이 멎자 서주희가 무대에 올랐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250여명의 관객들은 침을 꼴딱 삼켰다. 자살을 예고한 딸과 그것을 말리는 엄마의 격정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연극 ‘잘자요, 엄마’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두 주인공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보는 이에게 이별과 소통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연극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별이란 이런 것이구나.” 헤어짐을 선언하는 이는 마음을 정리했다. 갑작스런 이별을 맞은 이는 당혹스럽다. 이별을 막으려 설득하고 협박도 해보지만 소용없다. “널 위해 얼마나 많은 배려를 했는데….” 이런 말은 차라리 내뱉지 않는 편이 좋았다. 으르렁 거리며 묵은 감정을 폭발시키면 결국 이별은 추(醜)한 것으로 바뀌곤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떠난 빈 자리. 이별 후엔 아무 일도 못하리라 걱정했지만 삶은 계속되게 마련이다.


연극과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새끼손가락 걸고 우정을 약속한 내 친구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자살을 각오한 간질병 딸이 서주희의 몸을 빌어 무대를 오가고 있었다. 그녀가 울고 웃으면 어느새 관객도 따라 울고 웃었다. 서주희는 강렬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가득 메우기 보다 관객과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 이야기하길 즐기고 있었다.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는 대신 스스럼 없는 모습으로 관객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는 대신 스스럼 없는 모습으로 관객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연극이 끝났다. 수다시간이 마련됐다. 관객들은 눈물을 닦으며 배우를 향해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사랑하는 내 딸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너무 대견하고 당황했어요. 언제 어디서건 잘 살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 엄마가 같은 해에 며느리와 남편을 떠나 보냈어요. 제가 다 채울 순 없지만 노력할래요. 사랑해요, 엄마.” 이건 공연장에서 만난 배우와 관객이 아니라, 고해성사에서 만난 성직자와 신자들 모습이다. 기자는 생각했다. “내 친구는 무척 영리한 배우구나.”

착한 사람, 서주희


서주희는 착한 사람이다. 연극을 끝내고 작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녀는 헐렁한 스웨터로 얼굴을 가리며 고백했다.


“난 자주 혼나요. 며칠 전, 인터넷 게시판에서 어머니에게 우리 연극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네티즌의 사연을 봤어요. 근데 이미 매진이더라구요. 사이트를 다 뒤져서 환불된 표를 찾았죠. 관객 분께 직접 전화해서 표를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근데 배우가 너무 설치면 안되는데…. 그래서 혼났죠.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걸 어떻게 해요? 난 이럴 때 참 고민이더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친구가 말 좀 해봐요.”


소녀 서주희가 연극을 만난 것은 고교 입학 이후다. 중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과 일본의 소녀밴드 ‘핑크레이디’의 흉내를 내면서 인기를 모은 적 있다. 학교 체육복을 단체로 입고 춤을 췄다. 이미테이션 밴드 이름은 체육복 컬러를 쫓아 ‘블루레이디’로 했다. “인기 많았죠. 3~4개 반이 모여서 구경할 정도였으니까요.”


스스로에게 남다른 끼가 있는 줄 알았지만 설마 무대 위에서 밥 먹을 줄 몰랐다. 연극영화과 진학을 결심한 것도 고교 3학년 때다. 친구들이 학원을 다니며 연기 연습을 하는 동안 서주희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연기를 했다. 장애아동 연기를 하며 친구들에서 “오징어 사주라”고 외치면 아이들은 “저리 가라”며 손을 내젓곤 했다.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는 대신 스스럼 없는 모습으로 관객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는 대신 스스럼 없는 모습으로 관객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대입 실기시험. 그녀는 1년간 실생활에서 익힌 “오징어 사주라”를 연기했다. 합격자 명단엔 그녀의 이름이 포함됐다. 당대 하이틴 스타인 김희애, 전인화, 조용원, 박중훈, 변우민 등이 입학동기다. 그래도 입학 직후 선배들은 그녀를 찾아 칭찬했다. “네 실기 성적이 제일 좋다더라.”


대학에 들어와 비로소 연극을 배웠다. 그래도 연극에 몸 바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도 처음엔 ‘쌈마이’였죠. 얼마나 날라리 배우였는데요. 연습하는 동안에도 어디 놀러갈까 고민할 정도였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면서 KBS 공채 탤런트가 됐다. 서주희는 고민했다. “내가 정말 미치도록 좋아하는 건 뭐지?” 탤런트가 됐지만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비서 아니면 간호사였다. 누구에게 맡겨도 무난한 배역. 그녀는 방송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96년 연극으로 돌아온 뒤 처절하게 연습했다.


“난독증(難讀症)이 있었죠. 책 한 권을 정독하는 데 일년이 걸렸어요. 그래도 연극을 해야니까. 대사를 모두 녹음한 뒤 들으면서 외웠어요. 대사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그 역할 속으로 들어가려고 무척 애썼어요.”


그렇게 서주희는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했다. ‘세 자매’ ‘버자이너 모놀로그’ ‘레이디 맥베드’ 등 공연을 했다. 영화 ‘꽃섬’에도 출연했다. 최선을 다해 연기한 덕에 서주희가 출연한 연극과 영화는 공통점을 가지게 된다. 국내외 큰 상을 받거나 혹은 논란에 휩싸이거나. 어쨌거나 배우로썬 즐거운 일이고 영광스런 일이다.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소통을 꿈꾼다. 대한민국 연극계 최고 스타라 불리는 그녀는 무대에서 관객과 교감하기를 즐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소통을 꿈꾼다. 대한민국 연극계 최고 스타라 불리는 그녀는 무대에서 관객과 교감하기를 즐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수년간 절정의 연기력을 과시하는 그녀에게 고민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요. 공연이 끝났을 때, 그 인물과 헤어지는 게 힘들어요. 결국 제 안엔 떠나 보내지 못한 아홉 명의 여자가 함께 살고 있답니다. 이런 까닭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혼신을 다한 배우들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이죠.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예요.”


이젠 난독증도 고쳤고 우울증에서도 벗어났다. “무대에 오르는 일이 편해졌어요. 대본을 보면서 생각하죠. 관객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우리 집에 마실 나온 분들을 맞이하듯, 함께 소통하고 외로움을 푸는 것. 그게 제가 연극을 하는 즐거움이랍니다.”


고민한다, 무엇으로 변신할까?


내 친구 서주희에 대해 빼먹은 두 가지만 덧붙이련다. 하나는 그녀가 곧 연출가로 변신한다는 것. ‘행복한 왕자’라는 뮤지컬을 공동 연출하기로 했다. 서주희는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달고 다양한 연출 아이디어를 말했다. 덕분에 독자들에게 공개할 정보는 많지 않다.


“동화 ‘행복한 왕자’에 나오는 제비 아시죠? 제비는 왕자의 금붙이를 떼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죠. 그동안 따뜻한 나라로 갈 기회를 잃어버려요. 근데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날이 추워져 몸은 얼었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해졌네요’ 하고. 그렇게 착한 뮤지컬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소통할 거예요. 마지막엔 모두를 깜짝 놀래킬 장치도 생각해 뒀어요.”

연극배우 서주희(42•여)는 소통을 꿈꾼다. 대한민국 연극계 최고 스타라 불리는 그녀는 무대에서 관객과 교감하기를 즐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녀는 이런 부탁도 했다. “아직 남자친구가 없어요. 선배님들은 연극과 결혼한 셈 치고 연습에 매달리라고 하지만. 그래도 제 꿈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거예요. 제 매력에 대해 꼭 말해줘야 해요.”


그래서 지면에 남기기로 한다. 그녀의 이상형은 이런 사람이다. 착한 사람, 자상한 사람,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가진 사람,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내 친구 서주희였다. 그녀에 대해 더 궁금한 분들은 직접 공연장에 가서 대화를 나눠 보시도록.

스타를 넘어서다 서주희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