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두 군데, 그것도 장르가 다른 연극 '침향'과 뮤지컬 '시카고'의 연습을 오가려면 버겁지 않나.
연극 연습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한창 연습 중인 '시카고'는 작년에 했던 작품이라서 아직 감을 잃지는 않은 것 같다. 둘 다 신작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오랜 시간 뮤지컬만 해오다가 연극은 이번이처음이 아닌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지만 정극은 처음이다. 사실 크게 다를 건 없다. 노래 없는 배역으로 상도 받았는걸. 하하. 다만 뮤지컬은 주로 해피엔딩이고 슬픔이 있더라도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지만 연극은 순수하게 현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배우가 훨씬 깊어져야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동안 있는 그대로가 아닌 허황된 희망을 노래한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연극에 비하면 뮤지컬이 가볍다지만 당신은 그 안에서도 작품을 낱낱이 파고 공부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나도 꽤 연구하는 편인데 '침향'을 하면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웃음) 함께하는 중진 배우들은 물론 다른 출연진들 워낙 출중한 분들이 모여서 내가 하는 말 그대로 ‘기본’이었다. 연극이라는 장르며 맡은 역할도 그렇고…. 사투리 연기가 처음이라 걱정이다. 하지만 사투리는 정확한 구사보다 그 안에 담긴 정서를 전달하기 위함이지 않은가. 그 정서를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침향'의 영범 역은 50대의 아들이다. 지금까지 맡은 역 중 최고령인데.
55세니 지금까지의 배역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 나이를 가늠하기란 어렵지만 나이라는 건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아버지라면 나이가 많든 적든 이미 어른이니까. 그래서 '맘마미아!'에서는 내 나이보다 많은 역을 해도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나이는 많지만 아들 역이다보니 그게 풀어야할 숙제가 되었다.
-연극을 하면서 달라진 게 있나.
전에는 느끼지 못해도 느끼는 척 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는데 연극을 해서라기보다 배우로서 전보다 솔직해지는 거 같다. 실험적인 작품이 많은 요즘 <침향>은 ‘기본’에 아주 충실한 작품이다. 빠른 호흡에 익숙한 터라 선생님들의 호흡이 처음에는 느리게 느껴졌지만 ‘느리게 숨쉬기’안에 담긴 깊이를 안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당신도 급해 보인적은 없다. 무대 위의 성기윤은 어딘지 여유로워 마치 평균대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균형을 잡는 체조선수 같다.
(웃음) 작품이 요구하는 한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동안 한 번도 원톱 주인공을 해본 적이 없다. 주인공이 표현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뒤에는 작품 전체를 잡아줘야 하는 힘도 있어야 한다. 나는 주어진 역에 충실했던 것 뿐, 배우에게는 무엇인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간다는 생각, 신념이 필요하다. 이런 점들이 연극을 하면서 더 많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향해 가는 중인가.
음… 예술이라는 걸 하고 싶다. 예술은 이로 하여금 삶을 반추하게 하고, 희망을 주거나 행복을 느끼게 할 수도 있지 않나. 예술로 가능한 카타르시스, 그건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연을 만드는 수많은 파트 중에서 나는 연기 파트를 맡고 있는 것 뿐이다. 내가 연극을 좋아하는 건 여러 명이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만드는 과정이 사람 사는 모습과 닮았다.
-돌이켜 보면 당신은 흔들림 없이 꽤 일정한 보폭으로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하나를 하면 그거만 파는데 어느 정도 알았다 싶으면 미련 없이 다른 것을 찾는 성격이다. 그래서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1991년 '캣츠'로 데뷔한 이래 쭉 한 길만 걸어온 걸 보면 이 일이 내 성격에 맞는 거다. 파면 팔수록 어렵고, 하나를 끝냈다 싶으면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놀기 좋아하는 반에서 수업만 열심히 들어도 모범생이 되는 기분이다. 연기를 하면서 숨이 찰 정도로 달려온 적은 없다. 타박타박 천천히 걸어왔기 때문에 숨이 찰 일도 없다.
-'맘마미아!'만 해도 514회 공연을 개근하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는 500회 넘게 무대에 섰다는 게 대단할 수 있지만 극단 시키 등 외국에서 공연한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100회 정도해야 이제 시작이라며 회식을 하고, 1000회 정도는 해야 오래했다 인정을 한다더라.(웃음) 외국에서는 평생 '판타스틱스'만 한 노배우가 죽자 공연이 막을 내리기도 했으니까. 그쪽과 비교해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장기공연이 가능한 외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얘기다.
장기공연은 배우에게도 좋은 점이 많다. 무대는 안정된 직장이 아니니까 먹고살자면 작품 하나를 시작하면 바로 다음 작품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한 작품이 6개월 정도만이라도 보장된다면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데 보통 1·2개월 공연인지라 막이 오르면 몇 주 안 가서 다음 작품을 알아보느라 배우들의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다.
-‘신시 전속배우’라고 할 만큼 한 제작사와 쭉 함께 일해오고 있다. 타 제작사들의 러브콜도 있었을 법 한데 한 회사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신시뮤지컬컴퍼니의 전신이었던 극단 신시 시절부터 시작된 관계인데 단순히 정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기회를 주었고 거기에 부응했기에 오늘까지 온 게 아닐까. 종종 다른 극단의 제의를 받기도 하는데 난 작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 좋은 작품이 다가 아니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만드느냐가 우선이다. 뜻이 맞고 시선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작품이 좋아서 신시를 고집해온 거다.
-노래보다 춤을 더 잘 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춤이 주가 되는 작품을 해볼 생각은 없는지.
아마 '키스 미 케이트'이후로 춤이 많은 작품은 없었을 거다. '시카고'의 빌리는 원래 춤이 없는 캐릭터이다. 전 세계에서 춤추는 빌리는 패트릭 스웨이지와 어셔 다음으로 내가 세 번째란다. 전공으로 고려할 만큼 발레부터 현대무용까지 빠져있던 시기가 있었다. 몸을 잘 쓰던 때가 없었다면 몰라도 그때의 몸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어서 지금 춤추라면 무척 쑥스럽다. 하하. 그런 역할이 주어진다면 열심히 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안에서겠지.
-‘어떤 역을 줘도 가능하다, 작품을 꿰고 있는 배우다’라는 평을 듣는데 연출에 대한 욕심은 없나.
그건 과장이다. 하하. 습관처럼 다른 배역에 남보다 더 많이 접근하며 작품에 임할 뿐이다. 연출 생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길은 아니다. 연출자는 단순히 작품만 잘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다. 10년 정도 더 묵은 다음에 이 질문을 받으면 답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난 평생 배우를 꿈꾼다. 지금은 연기를 ‘할 때’인 것이고.
-가장 만족스러웠던 역이나 다시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역이 있다면.
어떤 배역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완벽했던 적은 없었다. 감이 빨리 왔던 공연도 돌이켜보면 2/3정도만 만족하니까. 마치 도공이 수 천도의 온도에서 자기를 굽다가 단 몇 십도를 더 못 올려서 다 구운 자기를 깨뜨리는 것처럼 내가 안 채워진다고 말하는 부분은 굉장히 작은 부분이다. 지금은 그런 부분들이 숙성되고 발효되는 과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