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악보를 넘기는 손이 연주를 망치면 안돼요

입력 : 2008.06.11 23:02

페이지 터너

'페이지 터너(Page Turner)'란 말 그대로 피아니스트의 곁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넘겨준다는 뜻으로 흔히 '넘돌이'나 '넘순이' 같은 별명으로도 불리지만, 러시아 출신의 명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같은 이는 "악보를 넘기는 사람이 전체 연주를 망칠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피아노 리사이틀이나 오케스트라 협연 때는 암보(暗譜)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낯설고 까다로운 현대 음악을 연주하거나 신곡 초연, 실내악에서는 이들 페이지 터너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실제 호로비츠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영화도 있습니다. 비올리스트 출신의 영화 감독 드니 데르쿠르(Dercourt)는 '페이지 터너'를 소재로 같은 제목의 복수극을 만들었습니다. 어린 소녀가 성심껏 준비해간 곡으로 오디션에 출전했지만 심사위원인 여성 피아니스트의 무관심으로 연주를 망치자 10여 년 뒤 앙갚음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완벽하게 악보를 외우지 않는 한 페이지 터너의 도움은 필수적이고, 콘서트 내내 피아니스트는 사실상 연주의 절반을 맡겨야 합니다. 이 때문에 음악계에서는 흔히 자신의 연주 성향이나 습관까지 잘 알고 있는 선후배나 제자, 가까운 지인에게 마치 '품앗이'처럼 서로 부탁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영화《페이지 터너》에서 피아니스트 역의 캐서린 프로트(왼쪽) LG아트센터 제공 와 페이지 터너 역의 데보라 프랑수아. /와이드미디어 제공
영화《페이지 터너》에서 피아니스트 역의 캐서린 프로트(왼쪽) LG아트센터 제공 와 페이지 터너 역의 데보라 프랑수아. /와이드미디어 제공
음악회를 앞두고 있는 연주자는 악보 다음 장의 첫 소절 정도는 미리 외워둡니다. 이 때문에 설령 페이지 터너가 조금 늦게 악보를 넘기더라도 '대형 사고'로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페이지 터너가 조금 빠르거나 늦게 악보를 넘기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연주자를 종종 마주칠 수 있지요.

한 유명 피아니스트는 까다로운 현대 음악을 협연하던 도중, 페이지 터너가 악보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기는 바람에 겪었던 곤란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두 손으로는 계속 연주를 하면서도, 고갯짓으로는 악보를 다시 뒤로 한 장 넘기라고 연신 사인을 보냈다고 하네요. 한 번쯤은 실제 무대에서 그런 표정을 보았으면 하는 짓궂은 상상도 생겨납니다.

콘서트홀에 입장할 때 페이지 터너는 보통 연주자보다 한걸음 정도 뒤늦게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한걸음 정도 뒤로 물러섭니다. 관객의 따뜻한 박수를 연주자에게 양보하고자 하는 속 깊은 배려겠지요.

보통 실내악 앙상블은 연주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연주 내내 피아니스트와 페이지 터너 사이에서도 들리지 않는 협연이 이뤄지고 있는 셈입니다. 비록 연주를 하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또 한 명의 협연자, 바로 페이지 터너입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