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배우 남경주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을 무대에서 보낸 그는 최근 읽은 책 'Art & Fear'의 한 구절을 즉석에서 읊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경험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판단은 어렵기만 하다.”
거칠 것 없고 두려울 것 없어 보이는 그이지만 경험이란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고, 판단 역시 갈수록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길을 함께 헤쳐 온 형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거라며 남경주는 옛 추억을 하나 둘 꺼내 놓는다.
사진 속 까까머리 중학생인 나와 지금 얼굴 그대로인 경읍 형은 참으로 사연 많은 형제이다. 여섯 살 터울인 형은 유난히 나를 예뻐해서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 애가 애를 업고 다니는 격이라 동네 어른들이 그만 좀 업고 다니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난 성격이 급한 편인데 어렸을 때는 욕심이 많아서 더 급했다고 한다. 내가 두세 살쯤인가 하루는 형이 나를 업고 태권도 시범 경기 구경을 갔다. 앞에서 기합 소리며 박수 소리가 나는데 등 뒤의 내게는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고개를 내밀려고 발버둥을 치다 급기야 쓰러졌던 모양이다. 놀란 형은 땅에 포대기를 펴고 자기 분에 못 이겨 쓰러진 동생에게 물을 뿌리며 정신 차리게 하느라 비지땀을 흘렸다고 한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서 가족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며 웃고는 한다.
내가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경읍 형은 이미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있었다. 유난히 형을 따르던 나는 형의 어깨너머로 무대를 보고 뭔지도 모르면서 뮤지컬에 빠져들었다.
당시 형은 동랑레퍼토리극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때 공연한 '유리동물원'과 '하멸 태자' 등은 의상이나 무대 기법 면에서 진보적이다 못해 혁신적인 것들이었다. 난 어린 나이에 당대 가장 센 공연들을 보며 자란 셈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꾸준히 배우던 기계체조를 그만뒀지만 나는 종종 형이 재학 중이던 서울예대 연극과 학생들에게 아크로바틱을 가르쳐 주곤 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예대와 친분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형의 학교는 나의 모교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사고뭉치였던 나를 구제하고자 형이 학교를 찾아온 것만도 수차례. 형은 늘 대화와 음악으로 사춘기 시절, 내 안의 불같은 성미를 잠재우려 했다. 그 덕분에 음악을 많이 들었고 음악은 마치 내 일부가 된 듯했다. 작은 방에 피아노와 이부자리가 전부였지만 형과 나는 그 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연주하며 늘 노래와 함께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형에게 ‘음악통론’등 악보 보는 법부터 체계적인 음악 이론 배우며 노래의 기본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미 배우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길은 형이 닦아준 것이기에 지금까지도 형은 나에게 선배이자 스승이고 가장 좋은 친구이다.
요즘 '소리도둑'을 하면서 아역 배우들과 같이 공연을 하다 보니 유년 시절이 부쩍 생각난다. 아이들 덕분에 나도 다시 순수해지는 기분이 들고, 열심히 하는 아이들을 보며 어른인 내가 뒤질세라 더욱 열심히 임하게 된다.
지난해 '벽을 뚫는 남자'도 참 행복하게 했던 작품이지만, 이번 작품은 매일 매일이 기쁨과 따뜻함으로 충만하다. 이제 곧 내 아이가 태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6월 초에 세상 밖에 나올 텐데 오래 기다려서인지 감회가 남다르다.
올해는 2세의 탄생 외에도 형과 나에게는 특별한 해이다. 경읍 형이 뮤지컬을 시작한 지 30년째, 내가 데뷔한 지는 24년째인데 스무 해 넘게 무대에 서 오면서 우리 형제가 한 무대에서 만난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다. 형의 뮤지컬 인생 30주년을 기념하고 싶어 함께할 만한 작품을 찾아봤지만 바로 공연을 할 여건이 안 돼서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 형제의 이야기인 '사랑은 비를 타고' 때처럼 형과 내가 허물없이 서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작품, 우리의 이야기와 닮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