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세월… 이념은 잔혹했고 사랑은 질겼다

입력 : 2008.05.21 23:29   |   수정 : 2008.05.22 06:50

제1회 차범석희곡상 당선작 '침향'

연극 《침향(沈香)》(김명화 작·심재찬 연출) 연습실에는 낯익은 배우들이 많았다. 박정자 손숙 박인환 정동환 김길호 성기윤 이경미 이지하 홍성경…. 다른 무대라면 각자 주인공이었을 화려한 이름들이 크지도 않고 심심할 것 같은 배역을 맡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들을 응집시킨 《침향》은 좌익 운동을 하고 월북했던 강수(박인환)가 56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며 펼쳐지는 드라마로, 제1회 차범석희곡상 당선작이다. 이 연극의 베스트 장면을 미리 본다.

#1. 강수의 회상

집에 돌아온 강수가 달밤에 마당에 나온 대목이다. 죽은 어머니(박정자)가 등장해 "달구신 달구신, 우리 강수 밤똥 안 누게 해주이소"라고 달님께 빈다. 강수는 노모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잠 안 오는데 이바구 하나 해주라" 한다. 노모는 "머스마가 옛날 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면서 춘향이 그네 타는 이야기를 하고, 아들은 스르르 잠이 든다. 이때 치매로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강수의 처 애숙(손숙)은 지붕에 올라가 있다. 애숙은 달을 보고 "우― 우―" 짖는다.

연출가 심재찬은 이 장면에 대해 "노모가 등장하는 환상 장면에서는 다른 인물과 사물이 정지해 있는 셈"이라며 "애숙의 치매도 젊어서 헤어진 남편에 대한 기억에 붙들려 있는 것을 표현한다"고 말했다. 박정자·손숙이 극중에서 시어머니·며느리 관계라는 것도 재미있다. 애숙 역은 손숙과 길해연이 번갈아 맡는다.
연극《침향》의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인환, 박정자, 김길호, 박웅, 이경미, 정동환, 이지하, 손숙. /신시뮤지컬컴퍼니 제공
연극《침향》의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인환, 박정자, 김길호, 박웅, 이경미, 정동환, 이지하, 손숙. /신시뮤지컬컴퍼니 제공

#2. 무덤과 화해

돌아온 강수가 어머니 무덤에 성묘 가는 길에 친구 택성(정동환)이 낫을 들고 나타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다. 이 연극의 갈등 구조 중 가장 강렬한 부분이 택성과 강수가 충돌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낫을 휘두르려고 56년을 기다렸다. 사람 나고 이념이지"라며 강수를 위협하던 택성은 자신이 강수 어머니의 무덤을 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낫을 내려놓는다.

심재찬은 이 연극에 대해 "한국의 정통 사실주의극들이 해오던 것에서 한 꺼풀 벗겨진, 진일보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택성이 물러나는 장면이 좀 느닷없다는 지적에 대해 "포기했을 세월이고, 강수를 꼭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을 것"이라며 "친구 어머니의 무덤, 땅이 주는 심덕"이라고 했다.

#3. 생강굴의 부부

생강굴은 강수와 애숙이 사랑을 나누던 공간이다. 여기서 애숙을 만난 강수가 "생강굴에서 니가 이래 오래 기다리는데 왜 안 오겠노. 이제 고만 내리 가자"고 하자, 정신이 돌아온 애숙이 손에 꼭 쥐고 있던 문서를 건넨다. 아들 영범(성기윤)이 이 문서를 읽는다. "…장산골 아래 이상헌 비트, 무전사 박영이, 탄창 다섯 상자, 식량 보급대 정헌영, 이순덕, 박주운…." 강수가 월북할 때 애숙에게 쥐어줬던 문서다. 강수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이다.

56년 만의 귀향은 우리 굴곡진 현대사의 상징이다. 《침향》은 산의 일부가 잘려 무대에 옮겨진 모습으로 표현될 무대미술(박동우)도 기대된다. 강수가 데려온 딸 영순(이지하)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웃음이 고인다.

▶6월 11일~2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2)577-1987

연극 '침향' 연습실.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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