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4.02 23:24
| 수정 : 2008.04.03 07:24
제18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손봉숙
배우 손봉숙은 "그 기침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1981년 5월 서울 대학로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연극 《앨리펀트맨》을 공연할 때였다. 극중 여배우 역을 맡은 손봉숙이 관객을 등진 채 상체(알몸)를 노출하는 순간, "어험 어험" 하는 헛기침 소리가 귀에 꽂혔다. 아버지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지는 그 후 딸의 연극을 한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
전화로 제18회 이해랑연극상 수상 소식을 전했을 때, 손봉숙은 대사 잊은 배우마냥 "어머나 어머나…"만 내뱉었다. 그녀는 49재가 안 끝난 상중(喪中)이었다. 지난달 28일 대학로에서 만난 손봉숙은 "2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내내 슬픔에 잠겨 있었다"며 "이해랑연극상은 또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먼저 부끄러움이, 나중엔 책임감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연극이 현실보다 훨씬 충격적이어야 하는데…. 무대에서 내가 '가짜'였던 게 아닌가 싶어 낯부끄러웠습니다. 희비(喜悲)가 이렇게 교차하다니. 좀 더 철들고 관객에게 감동을 주라는 엄명이겠지요?"
전화로 제18회 이해랑연극상 수상 소식을 전했을 때, 손봉숙은 대사 잊은 배우마냥 "어머나 어머나…"만 내뱉었다. 그녀는 49재가 안 끝난 상중(喪中)이었다. 지난달 28일 대학로에서 만난 손봉숙은 "2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내내 슬픔에 잠겨 있었다"며 "이해랑연극상은 또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먼저 부끄러움이, 나중엔 책임감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연극이 현실보다 훨씬 충격적이어야 하는데…. 무대에서 내가 '가짜'였던 게 아닌가 싶어 낯부끄러웠습니다. 희비(喜悲)가 이렇게 교차하다니. 좀 더 철들고 관객에게 감동을 주라는 엄명이겠지요?"
아버지가 육군 장교였던 손봉숙은 중경고교 2학년 때 명동국립극장에서 《한네의 승천》을 보고 인생 항로를 정했다. "정현 선생님의 파워풀한 연기에 전율이 일어나면서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1977년 《상자 속의 사랑 이야기》(연출 김정옥)의 잔다르크 역으로 데뷔한 손봉숙은 극단 자유에 들어가 《무엇이 될고 하니》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피의 결혼》 같은 총체극을 했다.
여배우들이 '연극을 계속 하느냐, 접느냐' 갈림길에 서는 30대 중반, 손봉숙은 국립극단에 들어갔다. "나 죽으면 누가 네게 용돈 주겠느냐"고 걱정하는 아버지 표정을 읽은 뒤였다. 그녀는 국립극단에서 《피고지고 피고지고》처럼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받은 작품도 남겼지만, 별로 한 것도 없이 한 해가 가는 등 주저앉는 느낌도 받았다고 했다. 1998년 국립극단에서 나온 손봉숙은 《토이어》 《시련》 《바람의 욕망》 등에서 만개했다.
왕자, 거지, 공주, 대통령, 광대, 의사, 미친 여자, 댄서…. 무대에서 산 30년 세월만큼 다양한 인물을 지나왔다. "어떤 역은 원해도 날 버리고 또 어떤 역은 안 맞아도 돌고 돌아 나한테 오는데, 예측할 수 없는 인생과 비슷하다"고 했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누운 아버지 손을 붙잡고 기도했어요. 딱 한 번, 마지막으로 하나님 역 한 번만 맡겨달라고. 오만이었죠. 역시 난 명배우 되긴 틀렸구나, 그랬습니다."
손봉숙은 자신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배우'라고 했다. 인물의 겉모습부터 그리기 시작해 내면까지 닿는 식이다. 오랜 꿈은 스튜디오를 마련해서 배우 훈련 메소드를 만들고 적용해보는 것이다. 키가 큰(169㎝) 이 여배우는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처럼 배우도 체계적으로 신체·표정·발음·발성을 닦은 뒤에 배역의 색을 칠해야 한다"며 "이해랑연극상으로 내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