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 무대… 인류의 신(新)문화 막이 올랐다

입력 : 2008.03.30 22:47   |   수정 : 2008.03.31 06:56

[10·끝] 東西문화 가로지르는 공연예술
프랑스 '태양극단'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
"서양 연극의 형태로는 더 이상 감동 줄 수 없어
국가·종교 경계 허물고, 다문화적 작품으로 성공
20여개국 배우들 공동창작·분배로 극단 운영해"

김학민 경희대 교수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징후는 정치·경제, 사회·문화, 과학·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경희대와 공동으로 지난 3개월간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홍익대·한양대·동국대·한국학중앙연구원 등 국내 유수대학의 12명 학자들과 함께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가 신(新)문명의 모습을 탐색했다.

정치영역에서 공화주의와 비폭력적 공존의 세계, 그리고 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공동체를 살펴보고, 경제영역에서 사람 중심의 경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집단협동의 현상을 탐색했다. 전문가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과학, 여러 분과학문의 통섭, 친밀한 소통을 지향하는 미술도 새로운 문명의 징후들로 나타난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융합의 문화는 21세기 문명의 새로운 모습이다. 동양과 서양의 유구한 전통이 한데 섞이며 새로운 인류 문명을 이끌고 있는 현상은 공연예술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김학민 경희대 교수(연극영화 전공)가 이질적인 문화를 아우르며 새로운 공연예술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는 프랑스 태양극단을 찾아가 생생한 리포트를 전한다.

태양극단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이 공연 직후 객석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김학민 교수 제공
태양극단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이 공연 직후 객석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김학민 교수 제공

"나는 동양 연극에서 서양 연극이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한 원천을 발견했습니다. 서양 연극의 형태만으로는 더 이상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프랑스 태양극단을 창단한 세계적인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Aria ne Mnouchkine)은 파리 뱅센느 숲 태양극단의 '카르투슈리(Carto ucherie)' 창고극장 정문에서 관객들에게 티켓을 팔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 시계로 12시를 확인한 뒤 막대기로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700여명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44년 전인 1964년 태양극단 창단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행하는 유명한 '문 열기 의식'이다. "배우가 관객을 초대하고 관객이 연극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란 설명이다.

≪제방의 북소리≫ 대본작가로 태양극단에 참여하고 있는 세계적인 여성 작가 엘렌 식수(Helene Cixuo s)는 태양극단의 다문화적 배경이 극단을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70여명 태양극단의 배우는 유럽·중남미·중동·일본 등 세계 20여 개국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동양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동양에는 아직 우리를 감동시키는 '유령'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그는 연극의 대본도 다양한 문화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문화적인 공동창작'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사실 제가 쓴 대본은 이미 출판된 상태였는데, 배우들이 연습하고 토론하면서 제 대본의 내용을 바꿨죠. 그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저도 공동작업에 참여하면서 대본을 고친 것이 아마 1000번도 넘을 거예요. 당시 작업했던 것을 정리한 17개 판본도 보관하고 있어요."

태양극단 터줏대감으로 20년 넘게 홍보를 맡고 있는 릴리아나 안드레옹(Liliana Andreone)은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있다"면서 "때로는 불법체류자의 입을 통해, 때로는 보스니아 난민의 모습을 통해, 모든 문화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들을 공연에 녹여내고 있다"고 말했다. 30년간 태양극단 음악감독으로 있는 장자크 르메트르는 "저는 태양극단의 연극을 '삶의 연극'이라 부르고 싶다"고 덧붙였다. 동양과 서양, 이슬람과 기독교 등 모든 문화와 종교를 넘어 '인간' 그 자체의 삶이 어우러져 표현된다는 말이다.

지금 공연되고 있는 연극은 3년 전 초연하고 다시 재공연에 들어간 ≪하루살이 삶들≫이다. 3대에 걸친 아르메니아계 러시아 가족과 유대인 가족의 고난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7시간짜리 대작이다. 엘렌 식수는 "이번 연극은 사전 대본 없이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며 "대본이 없기 때문에 10개월 이상 준비가 필요했다"고 했다.

카르투슈리 극장은 파리 시내에서 30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시골처럼 푸근한 정경이다. 극장 안은 동양의 소품과 디자인으로 동서문화가 융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관객을 맞는 로비 한쪽 벽면에는 황금빛 불상이 크게 그려져 있다. 옆면에도 100개가 넘는 작은 불상 그림이 가득하다. 관객들이 음식을 먹는 휴식공간과 입구에는 한국의 청사초롱이 밝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태양극단은 창단 이래 공동창작과 공동분배를 내세우고 있다. 연출가도 배우도 기념품을 판매하고, 수익은 모두 똑같이 나눠 갖는다. 오히려 불합리한 것은 아닐까? "이곳에서는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눕니다. 무대 작업도 같이 하고, 음식 준비나 기념품 판매도 같이 하고, 창작도 같이 해요."

연극 ≪제방의 북소리≫ 한국공연에서 내레이터 역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얼굴이 익숙한 여배우 줄리아나 카르네이로(Juliana Car neiro)는 간식 준비를 하다가 일손을 멈추고 말을 건넸다. "우리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수입을 똑같이 나눠요. 그렇기 때문에 나이든 배우는 어린 배우를 존중하고, 어린 배우는 선배 배우를 공경합니다."

연극 시작 전 티켓을 팔던 연출가 므누슈킨도 어느새 기념품 판매대에서 공연관련 책자와 비디오 등을 팔고 있었다. 열 살 안팎 아역배우들은 공연 중간 쉬는 시간에 음료수 수레를 끌고 관객석을 돌았다. 한 아역 배우는 "여기는 너무 재미있어요. 공연도 즐겁지만 함께 일하는 게 더 좋아요"라고 했다.


 

프랑스 태양극단의 연극‘제방의 북소리’의 한 장면. /조선일보 DB
프랑스 태양극단의 연극‘제방의 북소리’의 한 장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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