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오케스트라의 중심에 서다

입력 : 2008.03.19 23:04

음악계 '젊은 지휘자' 열풍
영국 출신 사이먼 래틀이 선구적 역할
런던필 유로프스키 등 '2세 지휘자' 많아
"영상물 통해 역동성 강조할 수 있어"

클래식 음악계에 '젊은 오빠' 지휘자 열풍이 불고 있다.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오케스트라 단원 100여 명을 통솔하는 노(老) 지휘자는 점차 옛말이 되고 있다. 요즘 유럽 음악계에서는 20~30대 '영 마에스트로(Young Maestro)'들이 당장 지휘계를 접수할 기세로 몰려온다.

지금 프랑스는 갓 22세의 젊은 지휘자 리오넬 브랭기에(Bringuier)의 출현에 환호하고 있다. 브랭기에는 14세에 지휘 공부를 시작해서 19세 때인 2005년 브장송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2006년에는 450여 년 역사의 독일 명문 오페라 극장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최연소로 지휘했다. 현재 브레타뉴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 지휘자를 맡고 있다. 아직 얼굴에서 소년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지휘자가 중장년 단원들을 통솔하게 된 셈이다.
'지휘 신동'의 본고장은 영국이다. 불과 25세에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맡았던 지휘자 사이먼 래틀(Rattle)을 베를린 필하모닉에 진출시킨 영국은 '제2의 래틀'에 눈을 돌리고 있다. 올해 25세의 로빈 티치아티(Ticciati)는 영국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타악을 연주하다가 래틀의 눈에 띄어 지휘자로 발탁됐다. 10대 시절 이 악단에서 타악을 맡았다가 지휘자로 전업한 래틀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티치아티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었던 지난 200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스키피오의 꿈'을 지휘하며 이 음악제 사상 최연소 지휘 기록을 수립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 밀라노의 명문 오페라 극장인 라 스칼라에서도 데뷔해 로린 마젤의 최연소 기록(24세)도 갈아치웠다. 지난해 영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경험 많고 유명한 단원들을 처음으로 만나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을 깜짝 등장한 혜성보다는 성장하는 나무로 바라보고 싶다"고 말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에서 연일 최연소 지휘 데뷔 기록을 쓰고 있는 영국의 지휘자 로빈 티치아티. /아스코나스 홀트 제공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에서 연일 최연소 지휘 데뷔 기록을 쓰고 있는 영국의 지휘자 로빈 티치아티. /아스코나스 홀트 제공
베네수엘라 출신의 27세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Dudamel)은 지난해 스웨덴 예테보리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데 이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차기 음악 감독으로 내정됐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기악에서는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내는 신동이 끊임 없이 출현하는 것과는 달리, 지휘에는 오랜 경륜이 필요하다는 음악계의 통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30대 지휘자들은 이미 중진의 반열을 넘보고 있다.

지난 11~13일 런던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한 러시아의 지휘자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Jurowski)는 35세 때인 지난해 이 악단의 새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파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차기 음악 감독으로 내정된 스위스 출신의 필립 조르당(Jordan)은 34세, 런던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이며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영국의 다니엘 하딩(Harding)이 33세, 명 지휘자 게르기예프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닉에 취임하는 야닉 네제 세겐도 32세다. 유로프스키와 조르당 등 아버지에 이어 지휘봉을 잡고 있는 '2세 지휘자'들이 많은 것도 주목할 현상이다.

세계적 음악 매니지먼트 회사인 아스코나스 홀트의 마틴 캠벨 화이트 공동 대표는 "지금 세계 음악계에는 확실히 젊은 지휘자들에 대한 컬트(cult) 현상이 있다. 오케스트라 담당자들도 노련한 중년의 지휘자들보다 젊고 재능 있는 지휘자들을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씨는 "예전 음반 시장이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던 시절에는 원숙한 표현력을 보여줄 수 있는 노장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클래식 시장의 무게 중심이 실황 공연이나 영상물로 이동하면서 역동적이고 비주얼을 강조할 수 있는 젊은 지휘자들의 파워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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