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심연에서 피어난 희망가

입력 : 2008.03.19 09:39

소프라노 유현아

불행했던 기억은 곱씹을수록 상처를 남긴다. 에디터가 그날의 사건을 의도적으로 묻지 않은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유현아가 먼저 말을 건네 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되었어요. 아들과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저녁을 먹을 거예요.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매년 그래왔어요. 그를 기리기 위해.”


1993년 2월 14일 필라델피아. 당시 스물일곱이던 남편은 차량 탈취를 노린 10대 두 명이 쏜 총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뒷좌석에 누워있던 6개월 무렵의 아들 다니엘은 차와 함께 사라진 지 몇 시간 만에 근처 길가에서 발견되었다. 결혼 2주년을 불과 2주 앞둔 밤이었다. 끔찍한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다.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실성한 사람처럼 밤낮을 보냈다. 혼절에 혼절을 거듭하던 그녀에게 피아노를 전공한 언니가 음악 공부를 권유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던 평범한 주부는 그렇게 성악가가 되었다.


피바디 음대에 입학한 후, 유현아는 아주 조금씩 남편의 부재를 받아들였다. 어지럽던 삶도 안정을 되찾아갔다. “원래 과학도였잖아요. 성악 공부도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웃음). 성악이란 자기 몸 자체가 악기로 사용되는 거잖아요. 그러다보니 수명이 꽤 짧다는 단점이 있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늦게 시작한 게 외려 다행이라 생각돼요. 쉽게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으니까요. 게다가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주변에서 좋은 환경과 기회들을 제공해주더라고요. 예를 들어 카네기홀(2004, 2005년)에서 노래해보겠냐는 제안 같은 것들 말이죠.”
 
정말 그랬다. 세계적 명성의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와 리처드 구드가 유현아의 절대적 아군이 되었으니 말이다. 제 1회 BB트러스트 수상(2003년)을 비롯해, 오페라 '차이데'(2006년)의 주역을 거쳐, 2007년엔 EMI레이블을 통해 데뷔음반을 발매하였다. 한국인 성악가로서는 최초였다. 그런 그녀가 작년 대관령국제음악제, 정명훈 지휘의 서울시향과의 협연 이후 고국을 다시 찾는다. 독창회(4.19, LG아트센터)로는 처음이라 프로그램 선정에 어느 때보다 신중을 기했다.


“전 마치 제가 요리사가 된 것처럼 리사이틀을 준비해요. 비유하자면 퍼셀과 멘델스존은 입맛을 돋우는 전채요리이고, 플랑크는 소화하기 쉬운 음식, 슈베르트와 슈트라우스는 제가 소개하고픈 메뉴예요.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맛은 일품인 요리랄까. 마지막으로 볼프는 제가 매우 좋아하고 즐겨먹는 음식이에요. 이번 공연을 위해선 특별히 디저트까지 준비했어요. 사실 미리 앙코르를 계획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한국에선 그래야 좋아하신다면서요?(웃음) 우리 가곡을 부를 예정인 것만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단어의 본래 소리를 훼손시켜가며 노래하지 않는다. 가사의 토씨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그래야만 관객과의 충분한 교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혹한 운명은 그녀를 전혀 다른 인생으로 이끌었다. 맹렬한 고통에서 그녀를 건져 올린 아리아를 통해 이제는 그녀가 타인의 영혼을 매만진다. 사위어간 절망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낸 그녀의 삶은 날마다 기적의 연속임을, 그녀의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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