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3.14 15:51
| 수정 : 2008.03.15 13:35
95년 코베인 사망 1주년 공연이 시초… 명동·홍대앞 거리 공연으로 폭발적 성장
1995년 4월 5일, 서울 홍익대학교 앞의 클럽 드럭(Drug)에서 커트 코베인(Kurt Cobain·1994년 사망한 얼터너티브 록 밴드 너바나(Nirvana)의 기타리스트) 1주년 기념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이 한국 인디 음악의 시작이다. 드럭에 자주 오던 팬들이 기타를 잡고 무대에 오른 것이다. 그때, 기존 언더그라운드 밴드와의 단절이 일어났다.
1996년 5월 어느 주말, 하루 차이를 두고 명동과 홍대 앞에선 난장판이 벌어졌다. 거리에 무대가 세워졌고, 행인들로서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밴드들이 록(rock) 공연을 벌였다. 크라잉 넛, 옐로우 키친. 모두 생소한 이름이었다. 기존의 록 밴드와는 이미지도 달랐다. 형형생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짧았고, 옷도 비교적 평범했다. 그들은 헤비메탈(heavy-metal) 대신 펑크(punk)와 그런지(grunge) 록을 연주했고, 결국 공연 끝에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없어져 난장은 극으로 치달았다. 이 공연의 이름은 '스트리트 펑크 쇼'. 홍대 앞의 라이브 클럽 드럭에서 공연하는 밴드들이 벌인 공연이었다. 단 이틀 동안 치러진 이 공연은 한국 인디 음악의 폭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들 이전의 헤비메탈 밴드들은 해외 유명 밴드의 곡을 연주했다. 창의력보다는 연주력이 우선이었다. 메탈리카(Metallica),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가 평가의 기준이었다. 주 활동 무대는 이태원이었다.
후일 홍대 앞 밴드로 불리게 되는 인디 밴드들은 여기서 벗어났다. 더블 듀스, 드럭 같은 초기 클럽은 펑크, 얼터너티브 록 음반을 틀어주는 바(bar)에서 출발했다. 그곳의 단골들이 밴드를 시작했다. 듣던 음악대로 펑크, 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연주? 코드 세 개만 알면 충분했다. 중요한 건 발산이었다.
1990년대의 그런지 록 혁명에 열광한 청춘들이 대거 홍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밴드라고 으스대는 태도는 없었다. 머리를 기르지 않아도 됐고, 가죽바지를 입지 않아도 됐다. 팬과 뮤지션이 한 무대에 섞여 노래를 했다. 그렇게 어제의 팬은 오늘의 밴드가 됐다.
그들도 처음에는 너바나,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를 커버했다. 곧 자작곡이 나왔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공연 목록에 올렸다. 크라잉 넛, 코코어, 허클베리핀,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등이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이때 만들어져, 홍대 앞의 주제가가 됐다. 그리고 온 국민의 애창곡 자리에 올랐다.
'인디'라는 명칭도 이때 나왔다. 당시 등장한 문화평론가들은 이 새로운 형태의 밴드들과 그들의 음악을 언더그라운드와 차별하여 인디펜던트 음악, 즉 독립 음악이라 불렀다. 기존 주류 음악계와 독립된 음악이란 의미였다. 새로운 명칭까지 얻었으니 이건 정말 새로운 게 됐다. 매체들은 그래서 '언더그라운드의 변화' 대신 '인디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달게 됐다. 인디 붐이 불었다. '대한민국 문화부 기자들은 인디로 먹고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하루가 멀다 하고 인디 밴드와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이 신문과 방송을 가리지 않고 소개됐다.
그러나 인디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색다른 무엇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래서 '불타는 화양리 쇼바를 올려라' '황신혜 밴드'처럼 이름이 특이하거나 해프닝을 벌이는 팀들이 주목받았다. 델리 스파이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차우차우'란 곡을 만들기도 했다. 문화평론가들은 인디 밴드들에게 '문화 게릴라'라는 말을 붙였다. 새로운 저항 문화의 기수라 여기기도 했다. 모두 틀렸다. 그들은 한번도 자신들의 음악을 저항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내뱉었을 뿐이다. 그건 1972년생부터 1978년생까지가 주가 된, 1990년대의 아이들이 시작한 음악적 놀이였다. 1990년대 중반의 홍대 앞 아니면 어디서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놀이였다. 그렇게 '홍대 앞'은 시작됐다.
그들 이전의 헤비메탈 밴드들은 해외 유명 밴드의 곡을 연주했다. 창의력보다는 연주력이 우선이었다. 메탈리카(Metallica),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가 평가의 기준이었다. 주 활동 무대는 이태원이었다.
후일 홍대 앞 밴드로 불리게 되는 인디 밴드들은 여기서 벗어났다. 더블 듀스, 드럭 같은 초기 클럽은 펑크, 얼터너티브 록 음반을 틀어주는 바(bar)에서 출발했다. 그곳의 단골들이 밴드를 시작했다. 듣던 음악대로 펑크, 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연주? 코드 세 개만 알면 충분했다. 중요한 건 발산이었다.
1990년대의 그런지 록 혁명에 열광한 청춘들이 대거 홍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밴드라고 으스대는 태도는 없었다. 머리를 기르지 않아도 됐고, 가죽바지를 입지 않아도 됐다. 팬과 뮤지션이 한 무대에 섞여 노래를 했다. 그렇게 어제의 팬은 오늘의 밴드가 됐다.
그들도 처음에는 너바나,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를 커버했다. 곧 자작곡이 나왔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공연 목록에 올렸다. 크라잉 넛, 코코어, 허클베리핀,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등이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이때 만들어져, 홍대 앞의 주제가가 됐다. 그리고 온 국민의 애창곡 자리에 올랐다.
'인디'라는 명칭도 이때 나왔다. 당시 등장한 문화평론가들은 이 새로운 형태의 밴드들과 그들의 음악을 언더그라운드와 차별하여 인디펜던트 음악, 즉 독립 음악이라 불렀다. 기존 주류 음악계와 독립된 음악이란 의미였다. 새로운 명칭까지 얻었으니 이건 정말 새로운 게 됐다. 매체들은 그래서 '언더그라운드의 변화' 대신 '인디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달게 됐다. 인디 붐이 불었다. '대한민국 문화부 기자들은 인디로 먹고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하루가 멀다 하고 인디 밴드와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이 신문과 방송을 가리지 않고 소개됐다.
그러나 인디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색다른 무엇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래서 '불타는 화양리 쇼바를 올려라' '황신혜 밴드'처럼 이름이 특이하거나 해프닝을 벌이는 팀들이 주목받았다. 델리 스파이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차우차우'란 곡을 만들기도 했다. 문화평론가들은 인디 밴드들에게 '문화 게릴라'라는 말을 붙였다. 새로운 저항 문화의 기수라 여기기도 했다. 모두 틀렸다. 그들은 한번도 자신들의 음악을 저항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내뱉었을 뿐이다. 그건 1972년생부터 1978년생까지가 주가 된, 1990년대의 아이들이 시작한 음악적 놀이였다. 1990년대 중반의 홍대 앞 아니면 어디서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놀이였다. 그렇게 '홍대 앞'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