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숙의 관현악, 뉴욕 카네기 홀에 울려퍼지다

입력 : 2008.03.09 23:03   |   수정 : 2008.03.09 23:03

신작 '로카나' 미국 초연 켄트 나가노의 지휘봉에
몬트리올 심포니가 연주 청중들 두 차례 커튼 콜

작곡가 진은숙<사진>의 신작(新作) 관현악곡이 118년 역사의 미국 최고 공연장인 뉴욕 카네기 홀에서 미국 초연됐다. 하지만 작곡가는 비행기가 13시간 가까이 결항되는 바람에 정작 그 현장을 놓치고 말았다.

지난 8일 오후 9시(현지 시각) 뉴욕 카네기 홀.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연주장을 찾은 명(名) 지휘자 켄트 나가노(Nagano)는 연주에 앞서 객석을 돌아보며 청중 2800여 명에게 말을 건넸다. 이미 이 공연은 매진을 이뤘다. 일본계 미국 지휘자인 나가노는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과 몬트리올 심포니의 음악 감독을 겸하고 있다.

"오늘 한국 작곡가 진은숙의 새로운 관현악곡인 '로카나(Rocana·산스크리트어로 '빛의 방'을 뜻함)'를 미국 초연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비행기를 타려던 작곡가는 뉴욕의 거센 비바람 때문에 연이은 결항으로 지금 막 비행기를 탔다고 하는군요. 마지막 마디를 연주할 때쯤이면 이곳에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5분여간에 걸친 지휘자의 설명에 뉴욕 청중들은 안타까움으로 "아~"하는 탄성을 냈다. 지휘자가 "평소 작곡가는 빛과 공간에 대한 작품을 즐겨 쓰는데, 빛과 공간을 이용해서 이곳까지 왔으면 좋겠다"고 하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은 날 오전 6시 30분,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초청 특강을 마친 작곡가 진은숙은 시카고에서 뉴욕행(行) 비행기를 잡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3차례 결항과 3차례 지연을 반복했고, 13시간이나 공항에 발목을 붙잡혔다. 오후 7시 40분쯤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공연이 모두 끝난 뒤인 오후 10시 30분에야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정에 가까울 무렵, 뉴욕의 호텔에 체크인하고 있는 작곡가를 겨우 만났다. 진은숙의 첫 일성은 "미국 카네기 홀의 초연 현장을 놓쳐버린 불운한 작곡가로 역사에 기록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지난해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세계 초연한 뒤, 작곡가 진은숙은 나가노의 위촉을 받고 이 관현악곡에 매달렸다. 협주곡이나 성악가나 합창을 곁들이지 않은 순수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관현악은 1993년 도쿄 국제 콩쿠르 1위 입상 이후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당시 입상곡은 작곡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공식 작품 목록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사실상 첫 관현악곡인 셈이었다.

작곡가는 지각했지만, 작품 초연은 단 1분도 늦지 않았다. 오후 9시에 공연 2부의 첫 곡으로 시작한 '로카나'에서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자로 잰 듯 정확한 나가노의 지휘에 맞춰, 타악과 현악이 번갈아 가며 격렬한 파동(波動)을 그려냈다. 이어서 현악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색채를 담아내다가 마치 프리즘을 투과한 온갖 색깔들이 하나의 지점으로 모여들듯 모든 악기가 하나의 음표를 그려나갔다. 20여 분의 작품 연주가 끝나자 뉴욕 청중들은 두 차례 따뜻한 커튼 콜을 보내며 초연 현장을 놓친 작곡가를 위로했다. 지휘자 나가노는 공연 직후 무대 뒤 인터뷰에서 "진은숙의 첫 주요 관현악 작품을 초연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이 작곡가는 미래를 예시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격찬했다.

이 작품은 몬트리올 심포니,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 서울시향과 중국 베이징 국제 음악제가 공동 위촉했으며, 진은숙은 이 곡을 나가노에게 헌정했다. 다음달 시카고에서 다시 연주한 뒤, 서울시향의 연주로도 한국 초연될 예정이다. 진은숙은 13일 금호아트홀에서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상 감상회를 갖기 위해 내한한다.


 

진은숙의 신작‘로카나’를 미국 초연한 지휘자 켄트 나가노가 청중들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있다./뉴욕=김성현 기자
진은숙의 신작‘로카나’를 미국 초연한 지휘자 켄트 나가노가 청중들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있다./뉴욕=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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