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처음 그림 판 날

입력 : 2008.03.06 00:52

아내 생일에 내 그림 선물한 美장교
그들의 입맞춤 보며 나도 행복 느껴

서석원 화가
장손으로 태어난 나는 말이 늦었다. 그때 내가 온종일 혼자 방에 엎드려 끼적거리는 그림 나부랭이들은 나와 바깥 세계를 통하게 해주는 바람이었다. 말이 어눌해 음지에서 맴돌던 초등학교 생활에 조금씩 볕이 들었다. 어느 샌가 미술대회는 당연히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한번은 집에서 열심히 그린 그림에 강아지가 배설을 했다. 누렇게 얼룩진 부분을 오려내고 새 종이를 이어 붙여 다시 그려서 출품한 것이 전국 3등, 1등은 아니라도 기뻤다. 1970년 늦은 봄, 지금의 남산도서관인 어린이회관에서 시상식이 있었고 목에 걸어 준 메달을 홍제동 집까지 오는 내내 벗질 않았다. 전교 선생님들 중 가장 예쁜 우리 4학년 7반 담임이신 이미희 선생님, 또 6학년 때 담임이신 구대회 선생님은 내 소질을 무척이나 아끼셨다. 난 늘 방과 후 청소 대신 그림 한 장을 그려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때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를 참 많이도 그렸는데, 그 시절의 그림들은 다 어디 갔는지…. 액자가 안 되었기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쓰레기처럼 없어졌다. 양장점 재단사인 엄마 옆에서 밤늦도록 모사한 수많은 '고흐'의 모작들도 역시 남아 있질 않다. 내 소년시절의 아름다운 흔적들이 사라진 것이다.

여러 번 낙방 끝에 들어간 대학생활은 시작부터 긴 휴교에 들어갔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미군에게 그림을 팔 기회가 생겼다. 맑게 갠 여름날, 중국풍으로 그린 산수화 한 점을 둘둘 말아 들어간 미군부대 안의 장교사택. 낙관도 하지 않은 내 그림을 미군장교는 4만원에 사 주었다. 아내의 생일선물이라며. 그림선물을 받아 든 미군 장교의 아내는 행복해하며 내 앞에서 남편과 입을 맞췄다. 적지 않은 돈이 든 봉투를 바지 호주머니 안쪽으로 깊숙이 넣고 부대를 나오면서 '구름 위를 걷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 감격은 돈을 벌었다는 기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그림이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감격이 더 컸는지 모른다.

한 번뿐인 자기 삶을 표현하고 그것으로 다른 이에게 기쁨까지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의 칭찬 한마디, 대학생 때 내 그림을 사서 아내에게 선물로 준 미군 장교…. 그들의 작지만 큰 격려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화가들이여, 힘냅시다. 화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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