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은 소재도 작품이 되는 역설의 미술을 아십니까?"

입력 : 2008.03.04 00:24   |   수정 : 2008.03.04 02:42

영국 화가 이안 다벤포트
작가의 공정 자체도 작품의 일부
모든 터부에 맞서 '왜 안돼?' 반발

영국 화가 이안 다벤포트(Ian Davenport·42)는 90년대 세계 미술계를 뒤흔든 스타 집단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s) 중 한 명이다. '생존하는 최고가(最高價) 작가'로 불리는 대미안 허스트(Damien Hirst·43)와 함께 영국 골드스미스 미술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캔버스, 합판, 철판 등에 되직한 페인트를 콸콸 붓거나 주룩주룩 흘려서 알록달록한 추상화를 그린다. 10년 전 어느 날, 그의 그림을 구입한 이탈리아인 컬렉터가 숨 넘어가는 소리로 그를 찾았다.

"큰일 났어요!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당신 그림이 플라스틱 널판지인 줄 알고 짐 싣는 들것으로 써버렸어요!"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다벤포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자기 작품을 설명하다가 옛 일을 들려주며 개구쟁이처럼 킬킬 웃었다. "처음엔 '오, 마이 갓!'하고 경악했지요. 컬렉터로부터 그림을 받아서 얼룩을 지우고 있자니 우스워지데요. 사람들이 예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이안 다벤포트(오른쪽)의‘붓기’연작 중‘청, 백, 청’. 152.4×152.4㎝. 합판에 유성 페인트. 1998년작. /학고재 제공
이안 다벤포트(오른쪽)의‘붓기’연작 중‘청, 백, 청’. 152.4×152.4㎝. 합판에 유성 페인트. 1998년작. /학고재 제공
그는 "역설이 빚는 긴장, 모순된 요소의 균형, 바보 같은 소재로 진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가령 학고재에 걸린 그의 작품 17점 중 '붓기'(Poured Painting) 연작 8점은 평평한 알루미늄판과 합판에 팬케이크 반죽을 들이붓듯 페인트를 부은 뒤 페인트가 둥글게 퍼지도록 내버려뒀다가, 어느 순간 판을 번쩍 들어올려서 페인트가 아치 형태를 이루며 흘러내리게 한 것이다. 우연과 인공을 뒤섞어 놓은 것이다. 그는 이 연작이 "실제로 팬케이크를 굽다가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벤포트의 작품을 흥미롭게 즐기기 위해선 "작가가 어떤 '공정'(process)을 거쳐서,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관객들의 그런 생각까지도 작품의 일부인 셈이다.

보수적인 독자라면 "페인트를 붓는 게 무슨 미술이야?" 할지 모른다.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가 세계 미술계에 돌풍을 일으킨 배경으로 다벤포트는 "유구한 전통에 대한 염증"을 꼽았다. "제가 학생일 때만 해도 영국의 모든 미대는 '회화 전공'으로 입학하면 회화를, '조소 전공'으로 입학하면 끝까지 조소를 해야 했고, 맨 먼저 가르치는 터부가 '유화물감과 수채물감을 함께 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유일한 예외가 골드스미스였지요."

"우리들은 이런 모든 터부에 대해 '왜 안돼?' 하고 대들었다"는 다벤포트는 "1988년 허스트가 조직한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우리들의 작품을 선보이자, 런던 평단과 화랑들이 '신선하다!'고 박수를 쳤어요"라고 말했다. 런던 남쪽의 한 공장터를 작업실로 쓰고 있는 그는 지금도 합판 위에 페인트를 흘리면서 '역설의 미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궁리를 거듭하고 있다. 21일까지. (02)720-1524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