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만드는 여자

입력 : 2008.02.21 02:22   |   수정 : 2008.02.21 04:53

뮤지컬 '이블 데드' 분장사 채송화… "110회 공연에 피 값만 800만원"

"단맛이요? 약간 짠맛이 나지 않나요?"

피(blood)를 찍어먹으며 그녀가 말했다. 한 손엔 뻘건 액체가 담긴 페트병을 든 채로. 그녀의 이름은 채송화(35),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분장사로 요즘엔 '피 만드는 여자'로 불린다. 방금 맛본 건 그녀와 분장팀 10명이 한 달 넘게 달라붙어 제조한 '공연용 피'. 3월 18일 충무아트홀에서 개막하는 '이블 데드(Evil Dead)'는 이 피를 회당 5ℓ씩 무대와 객석에 뿜어대는 코믹 호러 뮤지컬이다.

B급 공포 영화가 원작인 '이블 데드'는 이번이 국내 초연이다. 숲속 오두막에 간 대학생들이 괴상한 녹음테이프와 악령들을 만나며 요동치는 이야기다. 류정한 조정석 백민정 임강희 등 캐스팅도 화려하지만 이 뮤지컬의 진짜 주인공은 엄청난 양의 피다. 무대 앞 세 줄(43석)은 '스플래터 존(splatter zone)'으로 설정해 관객에게 비옷까지 준다. 벽에 4개의 유압식 노즐을 설치해 피를 뿜고 배우들이 숨기고 있던 피를 객석에 뿌리기도 한다. 제작사 소팩은 "진짜 '이블 데드' 마니아들은 비옷도 거부한 채 피를 뒤집어쓰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1차 판매분 중 스플래터 존 1200여 석은 발매 당일 다 팔렸다.
뮤지컬‘이블 데드’뉴욕 공연에서 좀비(되살아난 시체)들이 춤추는 장면. /쇼팩 제공
뮤지컬‘이블 데드’뉴욕 공연에서 좀비(되살아난 시체)들이 춤추는 장면. /쇼팩 제공
채송화의 고민은 두 가지였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쓰는 피(물엿+식용색소)는 너무 끈적거려 공연장에서 대량 사용할 수 없었다. 또 이 피는 일단 피부에 착색되면 빼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녀는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글리세린+물+식용색소'라는 새 레서피를 뽑아냈다. 글리세린(액체)은 화장품 원료다. "원하는 색과 점도의 피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는 이 분장사는 "각 성분의 배합 비율은 공개할 수 없는 '영업 비밀'"이라고 했다.

글리세린 때문인지 피는 미끌미끌 끈적임이 적었다. 색깔은 검붉지 않고 코피에 가까웠다. 냄새는 없었다. 빨간 식용색소만 넣으면 가벼운 느낌이 들어 녹색 식용색소를 살짝 첨가했다고 귀띔했다. "피 의 원가(原價)요? 110회 공연(550ℓ)에 인건비 뺀 재료비만 800만원이에요."
분장사 채송화는 요즘 피공장 공장장이다. 작업실에서‘공연용 피’를 실험하고 있다. /박돈규 기자
분장사 채송화는 요즘 피공장 공장장이다. 작업실에서‘공연용 피’를 실험하고 있다. /박돈규 기자
채송화는 성(性)을 전환시키는 뮤지컬 '헤드윅', 도깨비 분장이 인상적인 연극 '한여름 밤의 꿈', 화려한 보디페인팅을 보여준 안은미의 '춘향' 등 특이한 공연에 많이 참여했다. 프랑스에서 크리스티앙 쇼보 분장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국내 정상의 보디페인터다. 채송화는 "흔한 건 하기 싫다"고 설명했다. 분장의 역할을 묻자 "배우가 다른 인물로 들어가는 것을 돕고, 관객이 인물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돕는다"고 했다.

화마(火魔)에 일그러진 몸으로도 경기도 가평에 '두밀리 자연학교'를 열고 평생을 교육에 바친 'ET 할아버지' 채규철(1937~2006)이 그녀의 아버지다. 얼룩덜룩한 아버지의 몸을 보고 자란 딸은 몸에 색을 입히는 일을 하고 있다. 채송화는 "아버지는 '넌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될 거야' 주문처럼 말씀하셨는데 어느 순간 나도 '불가능은 없다'고 믿게 됐다"고 말했다.

▶6월 15일까지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 (02) 2051-3307

피뿜는 뮤지컬 '이블데드'. 쇼팩이 제공하는 하이라이트 영상입니다. /박돈규 기자


뮤지컬 '이블데드'에 쓰일 피. 색깔과 점도를 점검하고 있다. /박돈규 기자


뮤지컬 '이블데드'의 피를 만드는 분장사 채송화.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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