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서툰 사람들'의 배우 장영남
그녀는 거짓말쟁이다. 부끄럼 없이 여성 성기에 대한 담론을 늘어놓고(버자이너 모놀로그), 소녀부터 어른까지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고(경숙이, 경숙아버지), 불륜에 빠진 유부녀를 거침없이 표현하면서도(멜로드라마), 그녀는 아직도 무대가 겁이 난다며 믿기 힘든 투정을 부린다. 여러 보이는 외모 뒤로 다부진 강단과 천부적인 재능을 숨기고 있는 배우 장영남. 찬바람이 살을 에던 1월의 어느 날,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그녀에게 따끈한 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너무 어려운 주제에요!” 손사래를 치며 수줍게 웃는 그녀. 역시, 그녀는 거짓말쟁이다.
일단은, 배우 장영남
무대에서,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에서, 더 이상 대중에게 낯설지 않은 배우 장영남. 영화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등을 통해 ‘장진 사단’으로 활약해온 그녀가 최근 '헨젤과 그레텔'을 통해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진출했다. 진작 조명 받았어야 할 재목이지만 무대 위에서 천천히 내공을 쌓으며 ‘스타’ 대신 ‘배우’의 길을 걸어온 그녀다. “아직까진 무대가 더 편하죠. 제가 뭐든 적응이 좀 느리거든요.(웃음) 연극적인 발성과 움직임에 길들여진 터라 스크린 연기는 아직 익숙지가 않아요. 제가 보기엔 한 건지 안한 건지 모르겠는 연기도 화면상으로는 굉장히 크고 과장되게 잡히더라고요.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제 연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역의 확장일 뿐, 그녀의 스크린 진출을 기약 없는 외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현재도 연극 '서툰 사람들'에서 순수해서 서툰 여자 ‘유화이’ 역으로 열연하고 있는 그녀니까. '서툰 사람들'은 그녀의 대학 선배인 장진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도둑과 집주인이 만나 친구가 되기까지의 해프닝을 그린 장진식 코미디극이다. “장진 감독님이요? 똑 부러지죠. 본인이 직접 극작을 해서 그런지 캐릭터가 분명하고, 지시하는 바도 정확해요. 막연한 요구를 하지 않아 배우로서는 편하고 믿음직스럽죠. 근데 요즘 장가가시더니 아주 결혼 예찬론자가 되셨더라고요. 저한테 시집가라고 닦달만 안하시면 좋겠어요.(웃음)”
본격적으로, 사랑에 관한 수다
결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란 질문으로 스리슬쩍 운을 뗐다. 돌아온 대답은 ‘순하고, 서글서글하고, 밝고,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성실하고, 안정적인’ 사람. 욕심이 과하냐며 빙긋 웃는 그녀에게 슬슬 장난기가 돈 에디터, 함께 작업 한 배우에게 마음이 끌린 적은 없냐고 물었더니 이어지는 답변이 흥미롭다. “배우는 의지가 되는 ‘동료’죠. 연애상대로는 별로...(웃음) 물론 여배우도 여자 친구로는 참 인기 없는 직업이에요. 아마 결혼상대 순위로는 제일 꼴찌일걸요. 바라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사실 여배우 하면 좀 세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무대 위에서 박수 받는 보람으로 그 허전함을 채울 수밖에요.”
일전에 ‘장영남, 연극과 결혼하다’란 타이틀로 기사가 나간 덕에 얼결에 독신주의자 신세가 됐다며 쿡쿡 웃음을 터뜨리는 그. 이참에 해명하자면 그녀는 독신주의는 아니다. 그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질 뿐. 이별의 아픔을 겪어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일 테다.
“돈이 없어서 늘 걸어 다니고, 별 것도 아닌 일로 말다툼했던 기억?(웃음) 20대의 연애는 그랬어요.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저는 누군가를 이해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보다 내 것을 주는 데 인색했고, 이기적이었죠. 어찌됐든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건 참 슬픈 일이에요. 가족은 아무리 사이가 나빠져도 곁에 있지만, 연인은 헤어지면 완전히 남남이 되잖아요. 분명히 존재했던 사랑이 없던 일처럼 사라져버리는 거, 너무 서글프지 않나요?”
30대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녀는 앞으로 연애를 한다면 철저히 배려하고, 철저히 솔직해질 생각이란다. 두려워서, 상처받기 싫어서, 깊게 빠지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멜로드라마'의 강유경을 연기하면서 생각했던 건데, 뻥 터지기 전에 솔직히 표현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참고 살다 보면 성격만 버리죠.(웃음) 이젠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러고 싶어요.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그렇다. 추회(追悔)하는 일이 없도록,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자양분 삼아 미래의 상대에게 충실할 계획이다. 이제 남은 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