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발레 밑바닥부터 기었다… 그리고 우뚝 섰다

입력 : 2008.02.14 00:18   |   수정 : 2008.02.14 04:03

[세계로 점프한 한국 발레] [4] 김용걸
외국인에 배타적인 파리오페라발레에 최초의 동양인 남자 무용수
"남과 비교하지 말고 춤을 즐기고 당당해지자"

국립발레단의 스타였던 김용걸은 2000년 1월 짐을 싸 프랑스로 갔다. 스물여덟 살, 수석무용수 자리를 버리고 벌판으로 나가기엔 부담스런 나이였다. 1998년 파리국제발레콩쿠르 1등상을 받은 김용걸이었지만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는 견습생 오디션부터 뚫어야 했다.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때였어요. 몸상태는 좋았고 겁은 없었지요. '막차' 타고 온 겁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둥지인 가르니에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연습실에서 막 내려온 발레리노는 수건을 목에 걸고 있었다. 김용걸은 지금 그리스 비극이 원작인 오페라발레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케에서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르로 출연하고 있다. 안무가는 독일의 거장 피나 바우슈. "피나로부터 '무게감 있게 움직이라'는 주문을 받았다"는 김용걸은 "무대에서 내려오면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힘겨운 작품이지만 틀에 박힌 고전 발레 동작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는 글로벌 무대에서 가장 높이 도약한 한국 발레리노다. 파리오페라발레는 세계 최고의 발레단(단원 180명)이지만 외국인 단원이 5%에 불과할 정도로 배타적인 곳이다. 김용걸이 최초의 동양인 남자 무용수로 입단해 바닥부터 쉬제(위에서 3번째 등급)까지 올라간 것은 강수진·김지영보다 대단한 성취라는 평도 있다. 그는 "인생을 걸 만한 발레단"이라고 했다. "최고의 안무가들, 다양한 레퍼토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상하 관계, 의상·분장까지 챙겨야 하는 한국과 달리 무용수는 발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사회적인 시선도 다르고요."

김용걸은 열다섯에 춤을 만났다. 발레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단다. 그가 파리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기억 지우기'였다. "지금 사는 집에 과거와 관련된 물건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한국에서 누구였고 어떤 상을 받았는지는 이 발레단에서 살아남는 데 방해만 됐어요. 인정 받으려면 늘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르니에 극장에서 춤추고 있는 발레리노 김용걸.“ 마음은 비웠지만 목표는 당연히 에투왈(수석 무용수)”이라고 말했다. /김홍성 사진작가 제공
가르니에 극장에서 춤추고 있는 발레리노 김용걸.“ 마음은 비웠지만 목표는 당연히 에투왈(수석 무용수)”이라고 말했다. /김홍성 사진작가 제공
김용걸은 "인정이라곤 없는 냉혹한 시스템이지만, 감동 받기를 원하는 관객을 위해 무용수들이 겪어야 할 기본적인 의무"라고 말했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10대 소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춤을 즐기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당당하라'였다. "사실은 저한테 항상 하는 말이에요."

가르니에 극장 천장에는 발레리나들이 춤을 추고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었다. 마르크 샤갈이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등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바친 천장화다. '호두까기 인형' 공연 때마다 2막에서 중국춤을 도맡아 춘다는 한국인 발레리노는 "한국춤이 없어 불만"이라고 했다. 5~10년쯤 뒤엔 그의 꿈대로 '김용걸 버전' 안무작을 볼 수 있을까?



파리 오페라 발레단 

세계 최초의 직업무용단으로 1661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설립한 왕립무용아카데미가 모태다. 프랑스 발레의 자부심으로 통한다. '오페라의 유령'과 5번 박스석으로 유명한 가르니에 극장에서 연간 200회 이상 공연한다. 오페라와 발레를 한 무대에 올려 '오페라발레'라는 새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전설적 안무가이자 발레리노인 루돌프 누레예프도 1983~1989년 이 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김용걸의 파리오페라발레단 리허설. /박돈규 기자


파리 가르니에 극장의 천장화.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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