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2.02 00:52
| 수정 : 2008.02.03 03:13
'하이 서울 페스티벌' 총감독 맡은 무용가 안은미씨
아름다운 여자보다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어 머리 빡빡 밀었죠
제 본성은 타향살이 낯선 곳에서 깨달은 건 '난 천재가 아니다'
영하 7도. 모래 바람 거친 덕수궁에서 무용가 안은미(46)는 맨머리를 드러내고 펄펄 날았다. 빡빡머리의 현대무용가가 하이서울 봄 페스티벌 예술 총감독을 맡은 파격의 전말을 듣자고 했는데, "페스티벌이 성공해야 하니 사진 좀 잘 찍어달라"고 공식 멘트부터 날린다. 봄 페스티벌 주제가 '궁(宮)'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친구가 선물한 빨간 비단 조끼, 의상실 아저씨가 자투리 모아 만들어준 형광색 조각보 치마가 현란하다. 공무원들과의 회의는 물론 서울시장과의 미팅에도 당연히 이런 차림이다. 올해로 6년째인 서울시 축제의 총연출을 예술가가 맡은 것도 처음이지만, 그 예술가가 하필 엉뚱한 발상으로 이름난 안은미라는 점이 주목받았다.
"내가 어딜 가면 늘 의외라고 해요. 대구 시립무용단에 갈 때도 그랬는데, 저 실은 '조직인'이에요." 그래놓곤 우하하, 웃는다. "제 이름을 걸고 무용단을 만든 게 1988년, 스물다섯 살 때예요. 규모는 작아도, 기획과 예산, 인사 운용이 다 들어있어요. 그리고 이번 페스티벌은 시민들이 와서 좀 놀아보시라고, 서울의 역사와 문화 속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껴보시라고 할 거거든요. 그래서 저처럼 좀 엉뚱한 사람을 부른 거 같아요."
서울시청 건너편 대한일보 빌딩. 10층에 서울문화재단 하이서울 페스티벌 팀 사무실이 있다. 회의 책상 몇 개 놓인 방에서 그는 자유분방하게, 그러나 조직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티베트 무당처럼, 다음 날은 소복처럼 흰 옷으로 차려입고 사무실에 나타나는 그가 생각하는 축제의 본질은 난장(亂場)이다. '만만대로락'이라고 이름 붙인 거리 축제에는 참가자 누구나 왕이 되도록 했다. "당신이 킹·왕·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죠. 댄스 왕, 만화 왕, 라면상자로 의상 해 입고 나와도 돼요. "
―머리를 밀어 아름답고 우아한 무용가의 이미지를 뒤집은 것은 생존 전략입니까.
"튀려는 게 아녜요. 그게 나에게 맞아서 그래요. 머리를 깎은 것은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한 방편으로 택했죠. 내가 갖는 사회적 정체성을 고민했어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남자에게 대접받는 길로 갈 것인가, 춤꾼으로 예술가의 삶을 갈 것인가. 그 퍼포먼스가 머리를 미는 거였죠."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와 일찌감치 자신의 무용단을 꾸린 그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편안하고 폼 나는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예쁘고 우아한 그러나 지루한 삶이 과연 자기가 원하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그때 성남에 살았는데 동네 이발소에 가서 아저씨, 저 머리 좀 밀어주세요, 그러니까 깜짝 놀라요. 아가씨, 무슨 일 있어요? 막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뇨, 멋으로요, 그랬죠."
머리를 깎아서 손해 본 건 딱 한 가지, 데이트 신청이 확 줄었다는 거다. "외국에서는 그냥 하나의 스타일로 보는데…. 한국에서는 무섭다, 당차다, 뭔가 사연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죠. 어쨌든 나는 나의 삶의 태도와 이미지는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3만 원짜리 기계 사서 제가 직접 하죠."
"내가 어딜 가면 늘 의외라고 해요. 대구 시립무용단에 갈 때도 그랬는데, 저 실은 '조직인'이에요." 그래놓곤 우하하, 웃는다. "제 이름을 걸고 무용단을 만든 게 1988년, 스물다섯 살 때예요. 규모는 작아도, 기획과 예산, 인사 운용이 다 들어있어요. 그리고 이번 페스티벌은 시민들이 와서 좀 놀아보시라고, 서울의 역사와 문화 속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껴보시라고 할 거거든요. 그래서 저처럼 좀 엉뚱한 사람을 부른 거 같아요."
서울시청 건너편 대한일보 빌딩. 10층에 서울문화재단 하이서울 페스티벌 팀 사무실이 있다. 회의 책상 몇 개 놓인 방에서 그는 자유분방하게, 그러나 조직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티베트 무당처럼, 다음 날은 소복처럼 흰 옷으로 차려입고 사무실에 나타나는 그가 생각하는 축제의 본질은 난장(亂場)이다. '만만대로락'이라고 이름 붙인 거리 축제에는 참가자 누구나 왕이 되도록 했다. "당신이 킹·왕·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죠. 댄스 왕, 만화 왕, 라면상자로 의상 해 입고 나와도 돼요. "
―머리를 밀어 아름답고 우아한 무용가의 이미지를 뒤집은 것은 생존 전략입니까.
"튀려는 게 아녜요. 그게 나에게 맞아서 그래요. 머리를 깎은 것은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한 방편으로 택했죠. 내가 갖는 사회적 정체성을 고민했어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남자에게 대접받는 길로 갈 것인가, 춤꾼으로 예술가의 삶을 갈 것인가. 그 퍼포먼스가 머리를 미는 거였죠."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와 일찌감치 자신의 무용단을 꾸린 그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편안하고 폼 나는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예쁘고 우아한 그러나 지루한 삶이 과연 자기가 원하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그때 성남에 살았는데 동네 이발소에 가서 아저씨, 저 머리 좀 밀어주세요, 그러니까 깜짝 놀라요. 아가씨, 무슨 일 있어요? 막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뇨, 멋으로요, 그랬죠."
머리를 깎아서 손해 본 건 딱 한 가지, 데이트 신청이 확 줄었다는 거다. "외국에서는 그냥 하나의 스타일로 보는데…. 한국에서는 무섭다, 당차다, 뭔가 사연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죠. 어쨌든 나는 나의 삶의 태도와 이미지는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3만 원짜리 기계 사서 제가 직접 하죠."
―그렇게 자기 인식이 분명하니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웬만한 남자는 나를 싫어해요. 전화를 안 해요, 남자들이.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죠. 바빠요, 하고. 일할 때는 바빠요, 그러다가 공연이 다 끝나면 좀 쓸쓸하고 그렇죠. 그때는 왜 이 남자들이 전화도 안 하지? 그러다 또 진짜 바빠져요. 제가 결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건 스물여덟 살 때 이미 깨달았어요. 데이트는 좋아요. 하지만,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이 생기는 결혼은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우문을 던졌다. "춤 생각이요. 뭘 하면 좋을까, 늘 머릿속에서 생각이 움직여요." 그가 보여주는 파격을 그는 파격이 아니라 상상이고, 생각의 결과라고 말한다. 지난해 그는 1시간짜리 독무 'I can not talk to you(말할 수 없어요)'를 선보였다. 상대 무용수(?)는 닭. 철창 안에 가둬놓은 닭이 소리치고 날개 퍼덕이는 것을 춤으로 상대했다.
"사실 1시간 혼자 춤추는 건 60세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했지요. 독무는 무용가가 완전히 발가벗는 건데. 내공 다 드러나고." 그는 닭과 춤추면서 '적응'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리허설 때 나온 닭은 공연 때 못 써요. 그새 무대에 적응해버리거든요. 퍼덕거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냥 포기한 채로 가만있지요. 리액션이 없으면 못 하니까. 닭 12마리 사다가 리허설마다, 공연 때마다 새로 세웠죠."
―머리를 깎고 오색 찬란한 옷을 입고, 그렇게 자기표현을 하는데, 정작 자기 자신의 본성은 뭐라고 봅니까?
"타향살이죠. 1991년 무용단이고 뭐고 다 뒤로한 채 뉴욕으로 간 뒤 10년을 왔다 갔다 했어요. 그 뒤로 나의 삶은 서울에 있건 대구에 있건 어디서나 늘 타향살이라고 생각해요."
―왜 갔습니까?
"여기서는 답이 안 나오더군요. 위험 속에 나를 두면 나의 본성을 알 거 같았어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여자로, 무용가로 안정 속에 살았는데 뉴욕이라는 낯선 섬에 나를 떨어뜨리면 나의 무엇이 나올까 그것을 알고 싶었어요."
―무엇이 나왔나요?
"나는 천재가 아니라는 깨달음. 지구인이라는 자각. (깔깔 웃었다.) 지구력 있는 지구인 말예요. 예술가는 천재여야 한다지요. 나도 어렸을 땐 내가 천재일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드디어 난 천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죠. 예술가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상상력만으로는 안 돼요. 사실은 상상력도 학습되는 거지요. (지식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으로 큰 그릇을 갖추지 않으면 자기 장난조차 안 된다는 걸 알았지요. 장수하는 예술가가 되자. 그것도 파워예요."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가요.
"욕망이 고통이지요. 그래서, 뭐가 되고 싶다는 작전을 이제는 안 짜요. 뭐가 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목표를 뿌옇게 만들어요. 훈련에는 언어의 효과도 크죠. 욕망의 대상을 인정하는 언어를 쓰는 거예요. 남을 인정하면 나의 고통이 줄어요." 그는 5월 페스티벌의 주제 색이 핑크라고 소개했다. 몽환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핑크로 자기 삶의 한 장면을 칠하고 있었다.
"웬만한 남자는 나를 싫어해요. 전화를 안 해요, 남자들이.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죠. 바빠요, 하고. 일할 때는 바빠요, 그러다가 공연이 다 끝나면 좀 쓸쓸하고 그렇죠. 그때는 왜 이 남자들이 전화도 안 하지? 그러다 또 진짜 바빠져요. 제가 결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건 스물여덟 살 때 이미 깨달았어요. 데이트는 좋아요. 하지만,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이 생기는 결혼은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우문을 던졌다. "춤 생각이요. 뭘 하면 좋을까, 늘 머릿속에서 생각이 움직여요." 그가 보여주는 파격을 그는 파격이 아니라 상상이고, 생각의 결과라고 말한다. 지난해 그는 1시간짜리 독무 'I can not talk to you(말할 수 없어요)'를 선보였다. 상대 무용수(?)는 닭. 철창 안에 가둬놓은 닭이 소리치고 날개 퍼덕이는 것을 춤으로 상대했다.
"사실 1시간 혼자 춤추는 건 60세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했지요. 독무는 무용가가 완전히 발가벗는 건데. 내공 다 드러나고." 그는 닭과 춤추면서 '적응'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리허설 때 나온 닭은 공연 때 못 써요. 그새 무대에 적응해버리거든요. 퍼덕거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냥 포기한 채로 가만있지요. 리액션이 없으면 못 하니까. 닭 12마리 사다가 리허설마다, 공연 때마다 새로 세웠죠."
―머리를 깎고 오색 찬란한 옷을 입고, 그렇게 자기표현을 하는데, 정작 자기 자신의 본성은 뭐라고 봅니까?
"타향살이죠. 1991년 무용단이고 뭐고 다 뒤로한 채 뉴욕으로 간 뒤 10년을 왔다 갔다 했어요. 그 뒤로 나의 삶은 서울에 있건 대구에 있건 어디서나 늘 타향살이라고 생각해요."
―왜 갔습니까?
"여기서는 답이 안 나오더군요. 위험 속에 나를 두면 나의 본성을 알 거 같았어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여자로, 무용가로 안정 속에 살았는데 뉴욕이라는 낯선 섬에 나를 떨어뜨리면 나의 무엇이 나올까 그것을 알고 싶었어요."
―무엇이 나왔나요?
"나는 천재가 아니라는 깨달음. 지구인이라는 자각. (깔깔 웃었다.) 지구력 있는 지구인 말예요. 예술가는 천재여야 한다지요. 나도 어렸을 땐 내가 천재일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드디어 난 천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죠. 예술가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로운 상상력만으로는 안 돼요. 사실은 상상력도 학습되는 거지요. (지식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으로 큰 그릇을 갖추지 않으면 자기 장난조차 안 된다는 걸 알았지요. 장수하는 예술가가 되자. 그것도 파워예요."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가요.
"욕망이 고통이지요. 그래서, 뭐가 되고 싶다는 작전을 이제는 안 짜요. 뭐가 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목표를 뿌옇게 만들어요. 훈련에는 언어의 효과도 크죠. 욕망의 대상을 인정하는 언어를 쓰는 거예요. 남을 인정하면 나의 고통이 줄어요." 그는 5월 페스티벌의 주제 색이 핑크라고 소개했다. 몽환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핑크로 자기 삶의 한 장면을 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