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인터뷰]
박수근 '빨래터' 감정위원장 맡은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전문가가 '진짜'라 해도 못믿는 세태… 불신사회 반영
위작 시비 줄이려면 미술품 감정 위한 DB 구축해야
장삿속 공모전·가짜 학위… 미술계 내부 부패 심각
연초부터 진위 시비로 떠들썩했던 박수근(1914~1965) 화백의 유화 '빨래터'가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이하 감정연구소)에 의해 진품으로 판정이 났다. 이번 판정을 주도한 사람은 감정연구소에 의해 특별감정위원장으로 추대됐던 오광수(70)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원래 감정위원장은 가람화랑 송향선 대표이지만, 연구소 측은 감정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특검처럼 우리도 특감을 했다"고 했다. 감정이 끝난 뒤 오광수 위원장을 만났다. 어느덧 고희의 나이지만 미술평론가와 감정위원으로 젊은 사람들보다도 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번 사건뿐 아니라 지난 한 해 미술계를 뒤흔든 여러 사건에 대해 얘기하며 "미술계가 자정 노력을 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빨래터'에 대해 진품 판정은 났지만 아직도 의혹이 남은 것 같습니다.
"진짜라고 감정서 발급했는데도 사람들이 '진짜, 진짜냐' 합니다.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하도 불신사회라서 그렇지요. 이중섭 위작사건(이중섭·박수근 작품 2800여 점이 무더기로 검찰에서 위작 판정을 받은 사건) 여파도 작용했을 테고."
―진품을 확신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감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의 출처입니다. 소장자가 누구였고 누구를 통해 유통됐는가. 이 작품을 박수근에게 직접 선물로 받았던 미국인의 소재지(미국 켄터키주)가 나왔고, 어떻게 소장하게 됐는지 전화 인터뷰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뚜렷한 진품이라면 왜 의혹이 제기된 것일까요?
"보존 상태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의심을 받을 소지를 제공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기후 조건이 아닌 곳에서 보관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화를 보존하기 제일 안 좋은 조건입니다. 여름엔 굉장히 습하고 겨울엔 굉장히 건조하기 때문에 유화에 크랙(균열)이 생기고 캔버스 천이 상해 안료가 떨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보관이 잘 돼 마치 얼마 전에 그린 것 같은 느낌을 줘요."
―감정위원 20명 중 1명은 가짜라고 했다는데, 근거는 무엇입니까?
"생경한 스타일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박수근이 독특한 스타일을 완성하기 이전인 50년대 중반 작품이라 스타일이 좀 다릅니다. 저 역시 처음 봤을 때는 '어? 박수근이 이렇게 그렸나?' 싶었어요. 하지만 작품의 크랙과 캔버스 뒷면의 변색된 정도를 보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연스럽게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외선, 적외선, 뢴트겐 촬영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몇몇 사람들은 가짜라고 하겠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이 틀림없는 진짜로 보고 있습니다."
―진품이라도 박수근의 독특한 스타일과 거리가 멀다면 45억2000만원이라는 서울옥션 낙찰금액은 적정한 것인가요?
"박수근의 대표적 스타일은 아니지만 45억원 가치는 충분히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수근의 작품은 100억원이 넘어야 적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작 의혹을 제기한 미술 잡지 '아트레이드' 측에서 제시한 도판을 보면 1995년 시공사 도록에 실려 있는 또 다른 '빨래터'와 이 작품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비슷합니다.
"박수근이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봄이 오다'라는 수채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구도로 이 작품을 4~5년 뒤 유화로 다시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또 입선했어요. 박수근은 좋아하는 소재를 똑같이 여러 번 그렸어요. 같은 시기에 그린 것도 있고, 먼 훗날 다시 그린 경우도 있었어요. 53년 국전에 출품해서 특선한 '집'이라는 작품은 몇 년 뒤 '우물가'라는 제목으로 크기는 작고 구도는 똑같게 또 그렸지요.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재에 대한 애착이 있으면 계속 그리는 겁니다. 운보 김기창도 한 번 그린 것을 몇십 년 후 똑같이 그리기도 했어요. 그림 안 그려본 사람은 이해가 안되지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미술품 감정을 위한 DB구축을 빨리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우선 유명 작가들의 작품자료가 다 실린 전작도록인 '카탈로그 레조네'를 빨리 만들어야 해요. 유명 작가들만이라도 그런 데이터베이스가 완벽하게 짜여 있으면 위작사건이 생길 수 없어요. 연대별 작품 전체, 작가의 서명 등을 DB화하면 대체로 이런 자료를 통해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감정을 할 안목을 가진 사람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적어도 공립미술관에서 우리나라 근대미술을 다루는 큐레이터들이라도 감정훈련을 받아야 해요. 지금 공공미술관 큐레이터들의 작품 보는 안목은 상당히 미흡합니다. 진짜가 분명한 이중섭 작품에 대해 어느 한 사람이 가짜라고 의혹을 제기한다고 해서 미술관 전체가 우왕좌왕하는 현상을 보여서는 안돼요. 미술관 자체 내에서 그 정도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춰야지요."
―화랑 주인들이 감정을 하는 것 때문에 불신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은 화랑을 하며 작품을 많이 취급한 사람과 그 방면을 연구한 사람, 두 방면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나라에 화상은 70년대부터 형성됐으니 그들은 40년 가까이 작품을 사고팔았습니다. 화상들은 지식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경험에 의해서 작품을 보는 안목을 길렀습니다. 또 작품을 연구한 사람들은 작가의 기법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가 하는 다른 측면에서 작품을 봅니다. 그 두 측면이 다 모여서 감정을 하는 게 옳아요. 밖에서는 학계의 연구자들이 감정에 많이 참여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데, 사실 감정 영역은 연구가 빈약하고, 연구 자체에 한계가 있어요. 특히 젊은 세대로 오면 더 어렵지요. 화상들이 참여하니까 장사와 결부시키지 않느냐. 물론 의심이 갈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가 감정한 지 20년 가까이 되는데, 화상들이 진위에 대해 잘못 판단 내린 적은 있었지만, 그건 잘못 봐서 그런 거지 장삿속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경우는 없었다고 봅니다."
―미술대전 뇌물 수수, 신정아 가짜 학위사건, 이중섭 위작사건…. 작년부터 미술계에서는 문제가 쉬지 않고 터집니다.
"미술계 내부가 부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미술대전에서 상을 돈을 주고 사는 일에 미술협회 간부들이 개입했으니 그 아래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사실 둘러보면 이상한 조직의 이름으로 하는 장삿속 공모전들이 많아요. 입선, 특선 미리 정해진 듯한 장삿속 전시를 보면 예술계가 아니라 시장 바닥이 된 게 아닌가 합니다."
―왜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미술계만 이렇게 문제가 많이 표출되나요?
"다들 문제가 있겠지만 미술계는 도를 지나친 게 많아요. 또 미술인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너무 개별적이에요. 잘못된 거 봐도 방관하고, 무감각하지요. 미술계는 반성해야 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터지면 미술계가 자정의 노력을 보여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뻔뻔스러운 거지요."
고희에도 최일선에서 저술·비평활동
오광수씨는
돈과 권력이 오가고 툭하면 비리 사건이 터지는 미술계에서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만큼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사람도 드물다. 여기에 더해, 연구·저술·비평활동에서 어떤 석·박사들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미술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많은 이들이 그를 꼽는다. 한국 근현대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교과서인 '한국현대미술사'(열화당), '한국현대미술비평사'(미진사), '한국근대미술사상노트'(일지사)를 비롯해 30여 권의 저서를 썼고,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 현역 미술평론가다. 국전 심사위원, 환기미술관 관장,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2000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