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청춘의 바흐, 노년의 바흐

입력 : 2008.01.05 00:24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ould)가 등장한 이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모든 청춘 피아니스트들에게 하나의 표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불과 스물 세 살의 굴드가 한여름 뉴욕의 스튜디오에 두꺼운 코트 차림에 생수병을 들고 찾아와 속사포처럼 건반을 질주했던 것이 1955년입니다. 이 데뷔 음반으로 굴드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녹음에 얽힌 일화들은 지금껏 퇴색할 줄 모르는 '굴드 신화'로 남아있습니다.

독일의 꽃미남 피아니스트 마틴 슈타트펠트(Stadtfeld)도 지난 2003년 자신의 데뷔 음반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골랐습니다. 굴드가 첫 음반을 녹음했던 나이와 똑같은 23세 때입니다.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인기 피아니스트 임동혁도 다음달 예술의전당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합니다. 공교롭게 그의 나이 역시 올해 만 23세입니다. 영화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머리 속에 제임스 딘을 그려보듯이, 스물 셋의 피아니스트들은 글렌 굴드를 모델로 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글렌 굴드와 마틴 슈타트펠트, 임동혁(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
글렌 굴드와 마틴 슈타트펠트, 임동혁(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
하지만 청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못지않게 아름다운 노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있습니다. 지난 1995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에서는 당시 팔순의 여성 피아니스트가 두꺼운 악보집을 들고 건반 앞에 앉았습니다. 바흐를 비롯한 고전 레퍼토리로 이름 높은 로잘린 투렉(Tureck)입니다.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도 없이 투렉은 하나의 변주가 끝날 때마다 직접 악보를 넘겨가며 연주에 몰입합니다.

한없이 느린 박자에 50분 안팎의 연주 시간은 장장 90여 분까지 늘어납니다. 하지만 변주가 전개될수록 마치 구겨져있던 주름이 펴지는 것처럼, 그녀의 느린 템포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공연 영상을 보다 보면 객석 뒷자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빈 자리에 뛰어들어가 앉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듭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아리아로 출발해서 30개의 변주를 거쳐서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걸 벗어 던지고 태어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과도 닮아있지요. 굴드 역시 타계하기 1년 전인 1981년 다시 이 곡을 녹음합니다. 한결 차분해진 박자에, 낮은 허밍으로 자신의 연주를 따라 부르는 목소리는 데뷔 때보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임동혁 같은 청춘 피아니스트들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언젠가 다시 이 곡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해봅니다.

▶임동혁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리사이틀, 2월 26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1577-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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