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 대학로로 온 이유는?

입력 : 2008.01.02 16:47

'늘근 도둑 이야기' 연출 김지훈

지난 시절 외도로 비쳐졌던 연극배우의 충무로 행은 이제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반대로 영화배우의 대학로 행 또한 이제는 이슈가 되지 못한다. ‘연극열전2’로 수많은 배우들이 무대에 서는 올해만큼은. 서로의 경계를 넘는 ‘원 소스 멀티 유스’ 탈 장르 시대의 배우에게 한 장르만 고집하라는 건 오히려 폭력이다. 적어도 배우에게 있어 경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연극연출가가 메가폰을 잡거나, 영화감독이 연극을 연출한다면? 그것은 생소하다. 전례 없던바 아니나, 발자취는 많지 않았다. 장르의 벽이 높았던 까닭이다. 그런데 영화감독 김지훈은 요즘 점심이 되면 충무로 아닌 대학로로 출근한다.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의 연출을 위해서. 경계를 넘어, 그가 대학로로 온 이유는 무얼까?

예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업


1998년 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을 받은 단편영화 '온실'로 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진 김지훈 감독은 이후 '여고괴담'(1998), '질주'(1999), '비밀'(2000)의 조감독을 거쳐, 2004년 '목포는 항구다'를 통해 감독으로 정식 데뷔했고, 지난 해 '화려한 휴가'로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소상한 이력이 말해주듯 10년간 영화현장 밥만 먹은 그가 그런데 연극연출을 맡다니. 당장 '화려한 휴가'로 ‘프리미어 라이징 스타 어워즈 감독상’과 ‘대한민국영화연기대상 감독상’, ‘한국영화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가상’을 수상한 만큼, 영화감독으로서 굳건한 입지를 쌓아야 하는 이때에. 그것도 이제 막 시작된 ‘화려한 휴가’를 반납하고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 자체가 영화 한 편을 찍고 나서 쉬는 기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데, 감독학교가 있어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때 감독이 부대낄 수 있는 사람은 배우밖에 없는데, 이번에 연극하면서 두세 달 동안 배우와 뒹굴다 보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우와 호흡할 수 있는 자체가 대단한 공부니까. 영화든 연극이든 가장 중요한 지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고, 그런 점에서 배우를 이해하는 게 사람을 이해하는 길일 텐데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영화나 연극이나 결국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그의 예술론이다. 그러니 '늘근 도둑 이야기'를 통한 연출수업이 김지훈의 앞으로의 감독 인생에 있어 대단한 터닝 포인트까지는 아닐지언정, 작은 분기점은 될 수 있을 터.


그러나 대중은 조급하다. 기다리지 않는다. 이는 영화 관객이나 연극 관객이나 매한가지. 아마추어의 작품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관객은 없다. 그 아무리 거장감독이라도, 그의 대학로행이 초행길이라 해도 봐주는 법 없다. 작품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대중과 평단은 날선 비판을 가한다. 그가 아무리 배우는 자세로 임한다할지라도. 해서 '화려한 휴가' 감독 타이틀은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르는 일. 그의 명성을 믿고 생애 처음으로 극장을 찾을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니까. 더해서 그는 공연마니아까지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호모 루덴스, 김지훈


“관객에게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죠. 심오한 걸 원하는 관객도 있고, 연출가나 배우가 이끌어 주길 바라는 수동적인 관객도 있죠. 어떤 경우는 넋 놓고 있을 때 감동을 넣어주길 원하는 관객도 있겠죠. 그런데 이들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는 대중예술, 대중영화를 하는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맛있는 자장면을 만드는 중국집 주방장 같은. 제 작품은 고급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곰발바닥이나 삭스핀, 거위 간이나 원숭이 뇌 같은 음식이 아닙니다. '늘근 도둑 이야기'도 부조리극이라거나 참여극이 아니라 그냥 행복한 연극이에요. 저는 어떻게 보면 연출이기보다는 공연을 가장 먼저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들의 대표성을 띠고 작품을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의 눈으로 작품을 보니까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건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놔두고 루즈한 부분의 템포만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모실 관객들이 정말 편안하게 작품을 보실 수 있진 않을까요?”


그가 원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자장면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대중성, 그것 하나면 족하다. 호모 루덴스를 위한 유희거리를 만들어 주는 호모 루덴스가 바로 김지훈이다. 호모 루덴스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예술의 존재 이유로 번지고, 급기야 그는 3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까지 소급한다. 3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은 시신을 매장할 때, 멀리서 꽃을 꺾어와 시신과 함께 매장했다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져 시신을 매장할 때 관 위로 조화를 던지지 않던가. 그것이 인류 보편의 정서다. 덧붙여 그는 한국에서 통하는 정서가 미국에 간다고 통하지 않는 건 어불성설이라 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류 보편의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김지훈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예술가처럼 정서를 다루는 사람에게 경계를 구분해야 한다는 데에는 반감이 듭니다. 영화든 연극이든 무용이든 예술은 결국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헤집는 작업이기 때문에 저는 거기 경계를 세우지 않으려고요. 저는 그저 배관공처럼 관객에게 파이프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전달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를 연출하는 그의 꿈은 소박하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연극계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영화감독이긴 하나 영화산업만 발전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공연계의 파이가 커진다고는 하나 뮤지컬의 독주도 보기 좋은 건 아니다. 연극과 무용 등, 모든 장르가 경계 없이 더불어 성장하기, 그것이 그의 꿈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던 꿈이다. 그것이 그가 대학로에 온 까닭이며, 그래서 그의 일탈이 반가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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