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명의 배우, 의자 통해 말하는 연극 ‘보이첵’
英 에든버러 축제 초청받아
보이는 건 덜렁 의자 하나다. 높이는 낮아도 등받이는 길고 구멍이 뻥 뚫린 의자다. 거기 앉힐 누군가를 상상하기도 전에 배우 5명이 그 의자로 탐욕스럽게 달려든다. 다섯 조각으로 쪼개지는 의자. 배우들은 이제 그 조각들을 든 채 무대를 전후좌우로 가로지른다. 누구는 총 쏘는 시늉을 하고 누군 잠망경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열리는 ‘보이첵(Woyzeck·연출 임도완)’만큼 이야기·연기·연출·조명 등이 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연극은 드물다. 배우들은 죽기살기로 의자만 붙들고 늘어진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실화를 극화한 뷔흐너의 원작은 21세기 초 한국에서 대사의 90%를 버린 신체극으로 바뀌었다. 11명의 배우들은 의자 11개를 이용해 인물과 이미지, 공간과 메시지를 창조하며 열세 장면을 내달린다. 오브제와 움직임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상상력과 용기가 놀랍다.
유머도 잃지 않는다. 술집에서 의자는 술병이다. 배우들은 의자를 들고 부딪치며 건배를 외친다. 길게 일렬로 놓인 의자 끝에 앉은 보이첵이 고민할 때, 보이첵 대신 코러스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살해 대목은 이미지·조명과 어우러지는 명장면이다. 원작에 대한 정보가 없는 관객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게 이 신체극의 맹점이다. 재해석(권력에 의해 인간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즐길 만한 경험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휴먼 코메디’로 유명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다음달 이 ‘보이첵’으로 영국 에든버러 축제에 참가한다. 공연장은 영국 일간 가디언이 ‘페스티벌 속의 페스티벌’이라고 격찬한 오로라 노바 극장이다. 예술성 높은 작품들만 초청하는 오로라 노바에 한국 공연이 들어가기는 처음으로, ‘보이첵’은 벌써 10월 폴란드, 내년 4월 대만 공연이 확정됐다.
전체 소품을 보면 그 공연이 보일 때가 있다. 비행기 화물로 곧 실어 보낼 ‘보이첵’ 소품은 의자 12개뿐. 이 작품은 의자들의 총합인 셈이다. 3~4년 동안 못질을 하고 손때를 묻힌 배우들에게 그 의자는 고스란히 몸이다.
▶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760-4643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영국 에든버러는 한국 공연이 세계 시장으로 점프하는 도약대다. 8월 3주 동안 260개 극장에서 2000여 공연이 이어지는 올해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과 함께 최고의 공연 축제로 꼽힌다. 비언어극 ‘난타’와 ‘점프’, 양정웅 연출의 ‘한여름 밤의 꿈’은 이 무대를 통해 세계적인 공연으로 검증 받았다. 올해는 ‘보이첵’ 외에 비보이 퍼포먼스 ‘피크닉’, 타악 공연 ‘들소리’, SEO발레단의 현대무용 ‘Somewhere Else’ 등 14편이 참가한다. 현지 공연은 매표수입을 공연팀과 극장이 나눠 갖는 방식으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