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를 꿈꾸는 광대, 연극 '환상동화'의 배우 최대훈

입력 : 2007.06.29 11:03

‘배우’라는 호칭은 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광대’는 다르다. ‘광대’라는 말에는 특별한 아우라가 요구된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즐비한 영화계조차 오직 찰리 채플린에게만 ‘광대’라는 호칭을 허락한다.
최대훈. 1980년생. 그는 알록달록한 분장에 과장된 옷을 입고 광대를 연기하는 ‘배우’다. 아니, 아직은 그렇다.


“‘전쟁광대’요? 밀리고 밀려서 온 배역이에요. 제가 한 4순위쯤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앞서 제의를 거절했던 세 명의 배우들에게 감사할 뿐이죠.(웃음)”


그 4순위가 복병이었던 게다. 이제 그 아닌 전쟁광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연극 <환상동화>에는 총 세 명의 광대가 등장한다. 예술과 광기를 상징하는 예술광대, 슬픔과 사랑을 상징하는 사랑광대, 그리고 대립과 전쟁을 상징하는 전쟁광대. 그중에서도 전쟁광대는 삶에 대한 과격한 장광설을 늘어놓다가도 상황에 따라서는 과장된 몸짓으로 익살을 떨기도 하는, 이를테면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캐릭터다. 그리고 현재, 그는 몸놀림이며 표정이며 어디하나 예사롭지 않은 연기로 관객들을 쥐락펴락 하는 전쟁광대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대사도 많고 무엇보다도 감정의 기복이 심한 역할이라 체력소모가 상당해요. 제 의상만 동복이라 무진장 덥기도 하고요.(웃음) 광대 연기요? ‘태양의 서커스’ 작품들을 영상으로 보면서 많이 참고했어요. 특히 중간 중간 비치는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연기에 집중했죠. 영화 <물랑루즈>의 ‘백작’도 많이 연구한 캐릭터 중 하나예요.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그때그때 글로 적어놓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마냥 웃겨야 한다는 생각에 TV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오는 개그맨들도 흉내내보고 적당하다 싶은 애드리브를 슬쩍 넣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연출가는 그런 유행어나 저속한 유머가 자칫 값싸 보이는 연기를 만들 수 있음을 충고했고, 그는 그렇게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재의 카리스마 넘치는 전쟁광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학교-농구장-집’이 하루 동선의 전부였던 평범했던 고교시절.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 에이전시 관계자의 눈에 들어 연기를 처음 접하게 된 최대훈은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농구가 주는 쾌감과도 비슷했다. 그리하여 평소 동경해온 지질학 공부도 포기하고 무작정 들어가게 된 곳이 바로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그는 그곳에서 소중한 인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대학로의 재주꾼, 배우 오용이었다.


“<환상동화>도 오용 형이 하자고 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선택했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정말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거든요. 물론 형이 들으면 ‘내가 언제 널 가르쳤냐?’ 며 어이없어 하겠지만.(웃음) 형은 절대로 연기를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3시간 동안 거울만 보고 서 있으라든가, 함께 길을 걸으며 뭐가 보이냐고 넌지시 묻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제가 스스로 방법을 깨우치도록 도와줄 뿐이죠.”


이후 그는 단편영화 <북어대가리>의 장애인 역, 연극 <아타미 살인사건>의 살인범 역 등 주로 강렬한 캐릭터들을 소화해가며 연기자로서 잔뼈를 키웠다. 그는 특히 <아타미 살인사건>의 연출가 최규환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드라마 촬영을 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밤새 배우들에게 전할 코멘트를 A4지 3~4장 분량으로 빼곡히 써와 일일이 나눠주던 모습은 그에게 진짜 ‘프로’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주변 선배님들한테 감명 받는 부분이 더 많아요. 제 연기에 대해선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그저 즐기면서 하고 있다는 것 정도? 어쩌면 그게 더 복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평생을 즐기면서 연기하고, 그래서 결국 진짜 ‘광대’라는 호칭을 얻을 수만 있다면, 저로선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배우를 비하하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고는 있지만 사실 ‘광대’라는 건 이쪽 바닥에선 굉장히 고급한 칭찬에 속하는 말이니까.”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그는 분명 연기 자체를 즐기고 있었고, 좀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본능적으로 연기 할 줄 아는 배우였다. 마치 ‘광대’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작품을 좋아해요. 진짜 사람 냄새나는 작품이요.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할아버지는 그 주인공과 제가 같은 나이가 됐을 때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역이에요. 세월이라는 선물 없이는 불가능한 연기일 테죠.”


반듯한 외모에 말쑥한 차림을 한 그의 입에서 또 이런 진솔한 얘기까지 쏟아지니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그가 조금 얄밉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전쟁광대 말고 다른 광대역을 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느냐는,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사실 가끔 예술광대 역이 탐나긴 해요. 예술광대는 바로 제가 하고 있는 이 직업 그 자체잖아요. 배우가 배우 역을 해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게 아니죠. 예술광대의 대사 중에는 제가 꼭 한번 무대에서 해보고 싶을 정도로 욕심나는 것도 있어요. 근데 이런 말해도 되려나.(웃음)”


남몰래 예술광대를 꿈꾸는 그가 진짜 ‘광대’라는 타이틀을 달고 늙은 부부를 연기하게 될 그 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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