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속 미인도에서 빠져나온 듯 고운 선, 산사의 풍경만큼이나 맑은 음색,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고 오묘한 매력은 그녀에게 다른 여배우들과는 다른 색을 뿜게 한다. 옆집 언니처럼 친근하다가도 어느 순간 거부 못할 섹시함을 드러내며, 평범하나 결코 평범하지 않는, 진솔한 눈빛의 예지원.
올드미스가 아니라 골드미스라고 스스로를 얘기하는 그녀는 아찔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예지원 패밀리 패밀리 패밀리
대한민국 언니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던 ‘삼순이’의 선배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최미자. 2005년,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미풍처럼 잔잔한 사랑을 받았던 TV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주인공 미자는 방송국 말단 성우에 연애는 젬병, 나날이 상상의 나래만 늘어가는 평범한 삼십대의 독신 여성이다.
‘왜 나한테 뭐라 그래. 내가 어떻게 했다고 다들 나한테 함부로 해’ 하며 울분을 토하다가도 사랑 앞에선 푼수가 되는 미자가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은 건 더함도 덜함도 없이 ‘미자’ 그 자체였던 예지원의 연기에 있었다.
“미자는 원래도 있었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여성이잖아요. 노처녀, 노처녀 하는데 전 주변에 결혼 안한 언니들이 많아선지 제가 늦었단 생각을 못했었거든요. 그런데 미자를 만나고 놀란 거죠. ‘내 나이가 이거였어~’ 하면서. (웃음) 미자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고, 미자의 엉뚱한 공상마저도 진지하게 따져볼 만큼 미자를 통해 많은 생각들을 했죠.”
대중의 사랑을 받고, 좋은 캐릭터를 만나기도 했지만 예지원에게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각별한 작품 그 이상이다. 시트콤을 하던 1년 동안 진짜 한 가족처럼 정이 들어버린 시트콤 팀과의 인연이 영화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영화화 제의를 받았을 때 “이 식구들과 또 함께 할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인생의 선물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그녀. 더구나 영화사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순이’가 등장하는 영화 <귀여워>를 만든 ‘청년필름’이었으니 호흡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영화 역시 성공을 거뒀다.
“여러 상황이 받쳐줘도 좋은 작품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좋은 작품에 좋은 사람들까지 참 행복하게 작업했어요. 나를 알고, 내가 알아주는 이들과 함께이다 보니 다른 매체라는 낯섦 따윈 전혀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재능이 많던 어머니의 끼를 물려받은 예지원은 국악예고에서 한국무용 전공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용하는 걸 탐탁지 않아하셨고, 대안으로 어머니가 권유한 서울예대에서 그녀는 연기를 시작했다.
“그때 진로 바꾸길 잘한 것 같아요. 아마 무용을 계속 했어도 결국은 연기를 했을 거예요. 또 무용을 했던 게 연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요. 오디션 볼 때도 좋고요. 하하. 홍상수 감독님의 <생활의 발견>은 춤 덕분에 따낸 작품이거든요. 무엇을 했어도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왔을 것 같아요.”라는 예지원 역시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다.
지금은 일주일에 서너 차례나 만날 만큼 끈끈한 사이가 된 연출가 이지나의 연극 <태>에 마음을 뺐긴 후, 그녀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뮤지컬 <로키 호러 쇼>에 출연했었고, 안무가 안애순의 무용 <7+1>에도 참여하는 등 무대와 밀접하게 지내왔다. 이번 달만 해도 <밑바닥에서>, <헤드윅> 등을 봤다며 앞으로 볼 작품도 수두룩하단 그녀와 향하는 곳은 이지나가 연출하고 유지태가 제작한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의 무대. 이미 연습실에 가서 런쓰루를 봤다며 작품에 대한 기대를 전하는 그녀와 극장에 도착했다.
이끼의 꽃말은 엄마의 사랑
깜깜한 객석, 누가 볼 새라 조용히 성호를 그으며 예지원이 마음의 기도를 한다. ‘사람한테서 나온 건 끝이 있습니다.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을 내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걸 어떻게 끝내야하나.’라고 읊조리는 유지태가 등장하고 연극이 시작됐다.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는 어린 아기를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는 속설에서 시작해 나병에 걸린 딸을 위해 아기라도 낳아서 먹이려는 엄마의 진한 모성애와 그 안의 한을 담은 작품이다. 꽃은 일그러져도 향기가 난다며 나병에 걸린 딸을 찾아 헤매는 엄마 귀신과 혼자 남겨져 엄마를 기다리는 딸 귀신의 숨바꼭질 사이, 작품의 감초인 퇴마사 일행이 들이닥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폭소를 터뜨리던 예지원은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다 나아?’ 하는 딸의 대사에 이르자 눈시울이 졌어든다. 그러는 동안 얽히고설켜 있던 엄마와 딸의 사연은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고, 드디어 이들의 한은 굿을 통해 풀리면서 마무리된다.
“연습 때 본 것 보다 재미있고 가슴에 와 닿았어요. 특히 엄마와 딸이 서로를 찾아다니는 장면은 연습을 보면서도 눈물 흘렸던 부분인데 역시나 절절했고요. 한쪽 면이 밝다면 한 쪽 면은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이지나 선생님은 역시나 특유의 코드로 쉽고 재미있게 풀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셨더라고요. 뒷부분에 삽입된 안애순 선생님의 안무도 고급스럽고요. 대사하면서 몸을 써야 하는 배우들도 탄탄하던 걸요. 또 지태씨가 그렇게 밝은 모습의 연기를 하는 건 처음 보는데 아마 많이들 좋아하실 것 같아요.”
혼신을 다한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가 돌아갔다. 그로는 부족한 감상을 전하고자 분장실을 찾은 예지원은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누구보다 가슴조리며 공연을 지켜봤을 이지나 연출을 꼭 안는다. 극장 밖으로 나오며 못 다한 얘기들과 모성애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작품 속의 엄마는 옛날 엄마들 중에서도 전형적인 한국 엄마의 유형이잖아요. 무지해서 아이에게 애기라도 낳아 먹이고 싶다는 엄마가 너무 찡해요. 자신의 삶은 없잖아요. 우리 엄마도 일 쪽으론 전적으로 내 편이세요. ‘네가 하고 싶은 건 다했으면 좋겠다’ 하시는 든든한 지지대죠.”
배우는 배우면서 커진다
워낙 친한 이들이 많이 참여한 공연이라 그녀의 감상에는 밤을 새도 모자랄 만큼의 애정이 묻어있다. 그래서 공연 전에 어떤 기도를 한 건지 묻자 “에구~ 보셨어요? 창피해라. 고생한 배우들이, 그 시간이 귀중하잖아요. 전 영화 보러가서도 불이 꺼지면 짧게나마 기도하는 걸요. 내 친한 사람들이 참여한 작품을 내가 같이 극장에서 보고 호흡하며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죠.” 라는 예지원. 연습을 봐서 편하게 봤다며 한 달 뒤엔 또 얼마나 발전해 있을지 궁금하다는 그녀의 말대로 창작극 모험이다. 작품도 잘 나와야 하지만 인정받을 수 있는 시기 역시 잘 맞아 떨어져야한다. 더구나 연습하는 내내 많은 수정이 있기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불안을 느끼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그렇지만 함께 고민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큰 작품이 탄생할지 누가 아느냐며 그녀는 이지나 연출이라면 창작이든 번역극이든 함께하고 싶다고 얘기한다.
“공연 같이하자고 매번 얘긴 하는데 꼭 다른 스케줄이랑 겹쳤어요. 조만간 같이 한 작품하게 되지 않을까요? 연출과 배우는 서로를 많이 알아야 장단점을 적절히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과는 이미 가족과 같은 사이라 편한 작업이 될 텐데 언제 하자고 하시려나. (웃음) 뮤지컬 <그리스>의 샌디를 못한 게 아쉬운데 지금이라도 어떻게 졸라볼까요?”
예지원은 요즘 한창 발성과 노래를 배우고 있다. 차기작을 기다리는 동안엔 그게 무엇이든 많이 배우로 다니는 편이다. “춤은 계속 배우고 있고 요가도 8개월 정도 꾸준히 했어요. 4가지를 한 번에 배운 적도 있는 걸요. 연기 일은 스케줄이 딱딱 맞아 떨어지지가 않잖아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예정보다 작품이 늦게 들어갈 때도 있고, 몰아서 쉬고 몰아서 일하고... 쉬는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배우의 수명에도 차이가 생길 거예요. 전 일의 기다림을 배우면서 이겨내는 쪽이에요.”
시간만 허락하면 그녀는 다시 한 번 프랑스에 가고 싶단다. 직접 표를 나눠주던 연출가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던 이란계 배우를 만났던 태양극단,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연극노조가 생겨서 제대로 공연을 못 봤다던 아비뇽 축제의 에피소드들을 얘기하며 향수에 졌어든 예지원. 그녀는 4년 전, 프랑스 여행을 가서는 며칠 만에 맘을 바꿔 3개월 정도를 눌러앉아 프랑스어를 배웠었다. 이상하게도 작품마다 프랑스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었고, 함께 간 언니들이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걸 보며 쓰고 읽을 줄 알아야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학원 다니는 동안 같은 반의 유럽 애들이 금세 실력이 느는걸 보고는 더 욕심이 났다며 지금도 프랑스어는 계속 배우고 싶다니 예지원이 어찌 그냥 그런 배우일 수 있겠는가.
늘 꿈을 꿔야하고 긴장하며 살아야하는 여배우의 숙명이 그녀에겐 운명일지도 모른다. 요염한 천진무구 순이(예지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스팔트위의 집시’라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미자. 그리고 예지원. 그녀가 보여줬던 캐릭터는 어느 하나 무난한 게 없지만 그 사이엔 묘하게 비슷한 기류가 흐른다. 최근 영화 <눈부신 날에>에서 연기변신을 했나 싶었는데 그 역할마저 냉정하지만 아이에겐 한없이 자애로운 독특한 캐릭터라고 소개한다. 하고 싶은 역보다는 또 어떤 운명의 캐릭터를 만날지 모르지만 함께 하는 모두가 즐겁고 편안하게 작업하는 게 우선이라는 그녀. ‘예지원 다시보기’를 신청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