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건배”를 뜻하는 표현 중에 “다 드나(До дна)”라는 말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밑바닥까지’란 뜻으로, 우리의 “원샷”과 같은 의미다. 여기, 러시아의 한 선술집에서 끊임없이 “건배”를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술잔을 ‘밑바닥까지’ 비우고 또 비워내는데, 정작 그들의 삶은 더 내려갈 바닥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들이 외치는 “건배”는 자신들의 인생이 ‘밑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는 현실을 잊기 위한 마지막 절규인 것이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막심 고리키의 비극 <밑바닥에서(Нa дна, 한제 : 밤주막)>를 새롭게 해석해 만든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희망을 담은 음악과 생기 넘치는 위트로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원작의 암울한 분위기를 덜어내면서 관객들과 유연하게 소통한다. 그러면서도 고리키가 표현했던 극한의 절망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는 점은 이 작품이 지닌 여러 덕목 중 하나다.
근대 러시아의 한 낡은 선술집, 구석에 놓인 피아노는 굳게 닫혀있다. 선술집을 오가는 이들 모두는 먼지투성이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페페르는 살인죄로 복역하다 이제 막 출소한 상태고, 나스쨔는 자신의 몸을 팔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술집주인 타냐는 폐결핵에 걸린 딸 안나에게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샤친은 백작을 상대로 사기도박을 벌일 계획을 꾸미면서, 알콜중독으로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배우’를 끌어들이고 있다.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애써 잔을 들면서도 “더 살아야 하는 이유 따위 찾긴 글렀지”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는 피아노가 열린다. 절망 속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봄노래를 부르며 나타샤가 다가오면서부터.
희망을 불어 넣고, 희망의 증거가 되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홀로 선술집을 찾은 나타샤. 그녀는 간간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모든 게 잘 될 거야”라고 웃음 짓는다. 따뜻한 그 웃음으로 나타샤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기 시작한다. 매춘부 나스쨔의 ‘이상한 손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 사람이 널 사랑하는 게 확실한 것 같아”라고 말하고, 기억을 잃은 ‘배우’에게는 알콜중독을 치료해주는 병원을 소개해 준다고 약속한다. 타냐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도, 안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이도 나타샤인 것이다. 또한 나타샤는 그녀 자신도 희망의 증거가 되려 한다. 페페르가 수줍게 사랑을 고백할 때, 나타샤는 행복해하며 “어서 빨리 와줘요, 내 손을 잡아주세요”라고 노래한다.
구두는 신겨지지 못하고, 꽃은 떨어진다
하지만 언제나 희망은 흐릿하고 불안은 또렷한 법. 그들이 간절히 꿈꾸는 각자의 소망은 극이 진행되면서 안타깝게 조각난다. 안나의 죽음으로 타냐가 사온 구두는 자신의 딸에게 신겨지지 못한다. 질투심에 눈먼 전 애인 바실리사 때문에 페페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버렸고, 나타샤에게 주려던 꽃은 힘없이 떨어진다. 끝내 자신을 “기진한 영혼”이라고 규정하며 나타샤가 떠나버린 후에는, 마지막 불꽃을 발했던 ‘배우’마저 자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피아노는 다시 닫힌다. 또다시, 굳게 봉인된 희망은 언제 다시 열릴 것인지.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記述)>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창시한 고리키가 천착한 무거운 문제의식을 상당부문 덜어내고 있다. 무대 위의 모든 이들이 ‘왜’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지를 탐구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고리키의 원작보다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 다큐는 ‘지금, 이곳’의 현실도 근대 러시아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똑같다고 말하며 그 사회적 타살의 실체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다큐는 도입부에서 지하철 CCTV를 보여주는데, 전철이 올 때마다 멈칫거리던 남자는 결국 선로로 뛰어내려 버린다. 그리고 화면은 암전되는데, 그 어둠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왜’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파산의 기술>은 IMF 이후 우리사회가 낳아버린 파산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다루지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를 짜깁기하는 등 여러 영화적인 기법을 통해 60분의 시간을 몰입하게 만든다. 나지막한 감독의 나레이션과 달리 카메라는 매서운데, ‘살기 위해’ 노래방도우미로 나갔다는 여성의 인터뷰 사이사이에 ‘세계경제포럼’의 참석자들이 와인 잔을 맞대며 명함을 건네는 장면을 담는다. 상투적이라면, 이것은 어떨까. 옛날을 회상하는 386들이 시청광장에서 민중가요에 몸을 맡기며 짓는 웃음과, 그 시청광장에서 현재의 크레인 노조가 비장하게 죽창을 드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 감독의 성찰.
다큐는 그래서, ‘집행자와 부역자의 동업’으로 희생자가 자신이 희생자인 줄 모르는 현실을 잡아낸다. 갑자기 생겨버린 수많은 파산자들은 “내 죄의 값을 치르겠다”며 울먹이고,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마음먹기 나름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며 웃음 짓는다. <파산의 기술>은 결국 진짜 ‘적’을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총을 겨누는 고달픈 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우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쉬운 방법으로 슬픔에 대처했던 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파산의 기술>을 다시 본 날은 한미 FTA 타결이 임박했던 4월 1일이었다. ‘그’ 시청광장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연설을 마친 시위대는 시청광장을 빠져나와 안국동까지 뛰었다. 시위대는 처음에 미대사관으로 가려하다 막혔고, 청와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려 했으나 다시 막혔다. 도로를 막아버린 전경버스가 틈을 보인 구석에서 시위대는 전경과 대치했다. 우리들 앞에서 우리들은 "한미 FTA 반대한다"고 소리쳤는데, 정작 그 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더 불행해져야 하는가.
대학로 열린극장 2.24 -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