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수술을 잘 하는 병원은 어딘가요?”
그 길로 교장실로 불려가고, 패트릭은 집을 뛰쳐나와 런던으로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성처럼 꾸미길 즐기고, 여자가 되길 바라는 패트릭이 엄마를 찾아 나서는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왜 하필 패트릭은 태양계를 구성하는 행성 중 가장 멀리 떨어진 명왕성에서, 그것도 지옥의 신이 관장하는 명왕성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던 걸까? 차라리 ‘비너스에서 아침을’ 먹는다면 조금 더 이해가 빠를 텐데. 남자는 화성으로부터, 여자는 금성으로부터 왔으니까. 화성으로부터 왔지만 비너스가 되길 꿈꾸는, 혹은 비너스로 비치길 바라는 패트릭. 하지만 패트릭이 처음은 아니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의 오동구, <드랙퀸 가무단>(2005)의 로이, <나쁜 교육>(2004)의 이냐시오, <빌리 엘리어트>의 마이클,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의 아그라도, <나의 장밋빛 인생>(1997)의 루도빅, <크라잉게임>(1994)의 딜, <패왕별희>(1994)의 데이, <투 웡 푸>(1994)의 비다, 노시마, 치치, <프리실라>(1993)의 틱, 아담, 버나뎃, <M. 버터플라이>(1993)의 송 리링……. 이들 모두가 금성에서 아침을 먹으려 한 남자들이다.
여장남자들의 활약은 무대에서도 빛났다. <헤드윅>의 헤드윅, <렌트>의 엔젤, <프로듀서스>의 로저 드브리스, <갬블러>의 지지,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프랭크 박사……. 연극에서도 여자를 꿈꾸는 남자들의 활발하게 활동으로 무대를 넓혀왔다. <이>의 공길, <남자충동>의 유정 외에도 많은 연극 속에서 이들은 감초 같은 조연으로 등장했고, 지금도 등장하고 있다. 오래전 셰익스피어가 생존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여자가 무대에 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남성들이 무대에 서곤 했다. 이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 중국 경극에서는 여자 역에 해당하는 단(旦)역을 남자가 맡았고, 일본 가부키에서도 온나가타(女方おんなかた)라 하여 여자 역을 하는 남자배우가 따로 있었다.
어디 무대예술이 연극과 뮤지컬뿐이랴. 튀튀를 입은 남성발레단 ‘그랑디바’나 <고집쟁이 딸>의 마마 시몬느,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Who's who?>의 알렉스와 맥스 여성처럼 꾸미거나, 여성이 되고픈 남성들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쯤에서 숨 한번 돌리고 가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알파벳도 ABC부터. 먼저 용어의 정의부터 살피고 작품 속의 그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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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랙퀸(Drag Queen)
드랙퀸. 발음하기에 따라 ‘드래그퀸’이라 불리기도 한다. 드랙(drag)은 사전적으로 이성의 복장, 그 중에서도 ‘여자 복장’을 의미한다. 여기에 퀸을 더한, 드랙퀸은 ‘여성의 복장을 한 남성’을 일컫는다. 하지만 드랙퀸에 대한 정의가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다. 단순히 여자의 옷을 입은 남자를 드랙퀸이라고 할 순 없다. 드랙퀸은 곱상한 여성을 흉내 내지는 않는다. 이들은 독특한 화장과 가발, 의상, 몸동작 등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의 취미활동 혹은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무대나 축제에서 활동한다. 이런 쇼를 바로 드랙 쇼(Drag Show)라 부른다. 드랙 쇼란 ‘과장된 메이크업과 화려한 의상으로 과장된 표현을 하는 쇼’로, 여기에선 여자처럼 보일 필요도 없으며 자신만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
드랙퀸에 대한 오해는 이들은 트랜스젠더와 혼동해서 일어난다. 드랙퀸은 여자가 되고 싶어서 여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드랙퀸을 동성애자로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혹은 성전환자건 여장을 하면 드랙퀸이다. 다시 말해 성적인 취향과는 무관하다. 반대말로는 남성 복장을 입는 여성을 의미하는 드랙킹(Drag King)이 있다. 드랙퀸과 비슷한 의미로는 크로스드레서와 트랜스베스타잇이 있다. 영화 <투 웡 푸>와 <프리실라>의 삼총사들과 <드랙퀸 가무단>의 로이, 뮤지컬 <갬블러>의 지지가 바로 드랙퀸이다.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
크로스드레서란 이성복장선호자를 말한다. 언뜻 보기엔 ‘드랙퀸’과 같게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크로스드레서는 이성의 복장을 착용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드랙퀸이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선호한다면, 크로스드레서 남성은 예쁘장하고, 곱상한 여성으로 비치길 선호한다. 또한 크로스드레서는 트랜스젠더와도 다르다. 크로스드레서는 ‘나는 원래 여자(남자)인데 육체가 이와 반대로 태어났다’는 트랜스젠더의 운명적 절박감을 느끼지 않는다. 크로스드레서는 이성의 복장을 추구하지만 사회적으로 자신이 남성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크로스드레서와 비슷한 말로 ‘트랜스베스타잇’이 있는데 흔히 같은 단어로 취급되지만, 엄밀하게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크로스드레서는 이성의 복장을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트랜스베스타잇의 경우는 성적만족감의 성취를 목표로 둔다. <프로듀서스>의 로저 드브리스가 바로 그런 좋은 예다.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
앞서 설명했듯 트랜스베스타잇은 이성복장도착자, 혹은 이성 복장 착용자를 일컫는다. 복장을 입는 것으로 만족하는 크로스드레서와 달리 트랜스베스타잇은 성적인 만족감을 목표로 하지만, 그 사실이 트랜스베스타잇이 동성애자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트랜스베스타잇의 다수는 이성애자이며 특히 남성들의 경우 사회적인 역할로 돌아가면 다시 남성들의 규범을 따르고 거기에 만족한다. 반(反)문화로 번역할 수 있는 카운터 컬처(counter culture) 개념을 도입한 J.M.잉거에 따르면 트랜스베스타잇은 전통문화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1960년대에 급속히 늘어났고, 정신적 질병이라기보다 하나의 성적 취향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심리학 용어인 트랜스베스타잇에 ‘도착’ 혹은 ‘변태’라는 뉘앙스가 깔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록키 호러 쇼>의 프랭크 박사는 트랜스베스타잇의 전형이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
트랜스젠더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자신을 반대 성의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육체적인 성과 정신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은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지만, 어원을 따지자면 조금 다른 개념이다. 트랜스젠더의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Sex)이 아닌 사회적인 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타고난 성이 아니라, 환경과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진 성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젠더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거치지 않더라도, 자신을 반대 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트랜스젠더다. 실제로 트랜스젠더 모두가 성전환 수술을 원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트랜스젠더는 반대 성을 쫓으면서도 성전환 수술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육체와는 반대되는 성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영화 <패왕별희>의 데이,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뮤지컬 <렌트>의 엔젤이 여기에 속한다.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
트랜스섹슈얼도 트랜스젠더처럼 육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일치하는 않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랫동안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을 뜻할 때 사용되었다. 사전적으로는 섹슈얼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성을 의미하므로, 트랜스섹슈얼이라 하면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상대의 성을 따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젠더의 개념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가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 날에도 일반인들은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전적으로는 분명 생물학적인 성을 바꾼 이들을 의미한다. 영화 <크라잉게임>의 딜과 뮤지컬 <헤드윅>의 헤드윅이 바로 트랜스섹슈얼의 전형이다.
1도 2도 될 수 없는 1.5의 슬픔
트랜스섹슈얼 ‘헤드윅’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증빙하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 혹은 2로 시작한다. 1은 남자, 2는 여자.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21세기 신인류의 주민등록번호의 뒷자리는, 남자 3, 여자 4로 시작한다. 외국인에게도 외국인등록번호라 해서 일종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다.) 1이든 2든, 혹은 3이든 4든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고 있다면 자연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1.5와 같은 유리수는 없다. 양 다리 사이에 1인치의 살점이 남아있는 헤드윅은 1도 2도 될 수 없는 1.5의 경계인이다.
헤드윅의 본명은 한셀이었다. 통일이 되기 전, 동 베를린에서 살았던 그는 데이빗 보위나 루 리드, 이기 팝 등의 음악에 심취했던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다. 소심하다면 소심한.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전환기가 찾아오는 건 미군 병사 루터를 만나면서 부터다. 루터는 한셀에게 여자가 되면, 다시 말해 트랜스섹슈얼이 된다면, 한셀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프러포즈했다.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욕구가 한셀로 하여금 성전환수술대 위에 눕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술의 실패로 한셀에게는 1인치의 살덩어리가 남게 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무엇이 되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긴 했지만, 이내 루터에게 버림받은 한셀은 먹고 살기 위해 록그룹을 조직한다. 그 그룹의 이름이 바로 ‘헤드윅과 성난 1인치’다. ‘헤드윅’은 바로 그 때부터 사용한 예명이라고나 할까. 트랜스섹슈얼이면서도, 트랜스섹슈얼이 될 수 없는 헤드윅은 온전한 남자일 수도, 그렇다고 완벽한 여자일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다. 그녀의 노래에 절망과 슬픔이 배어있는 건 다 그런 이유다.
헤드윅의 이끄는 ‘헤드윅과 앵그리밴드’의 콘서트는 1994년 드랙 쇼를 전문 공연장이었던 ‘스퀴즈박스’에서 처음 선보였다. 1인치 때문에 사랑했던 남자 루터와 토미에게 버림받은 그녀를 관객들은 사랑했다. 관객들은 오히려 그녀의 1인치를 위로해주었다. 순식간에 팬클럽이 조직되고 마니아까지 생기면서 헤드윅은 공연장을 옮겨가며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게다가 언론의 조명과 찬사를 받으며, 헤드윅의 이야기는 영상으로도 보여졌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헤드윅>은 2001년 선댄스영화제 감독상과 관객인기상, 베를린영화제 테디 베어상, 도빌영화제 씨네 라이브 상, 비평가상, 최우수영화상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였다.
국내에서 영상물로 먼저 인사한 헤드윅은 2004년 직접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국내에서도 수많은 팬을 거느리게 되었다. 지금도 헤드윅은 대학로에서 공연 중에 있으며, 5월27일 서울과 30일에는 부산에서는 대규모 콘서트도 기획하고 있다. 트랜스섹슈얼 헤드윅, 그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그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아프지 않으리라. 그녀에게는 그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헤드헤즈’들이 있으니.
천사에게도 성별이 필요할까?
트랜스젠더 ‘엔젤’
Carpe diem. ‘내일은 없다, 단지 오늘만이 있을 뿐, 현재를 살며 사랑하라’는 격언을 남기고 사라져간 여자, 엔젤.
엔젤은 뉴욕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 다시 말해 에이즈 환자다. 성전환수술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장한 채로 생활하고 동성(同性)인 남자를 사랑하는. 아마도 여간한 눈썰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또한 성직자가 아니고서는 그런 그녀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여성만큼 가냘픈 몸매에,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자태, 그리고 아리따운 목소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매력 곱디고운 마음씨. 어찌 그런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해도 그녀의 매력 앞에선 힘을 잃고 만다. 뮤지컬 <렌트>의 콜린스는 엔젤에게 반한 남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엔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만이 다른 남자들과 다를 뿐.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에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오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항변이라도 하듯 엔젤은 죽는 순간까지 한 순간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녀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에이즈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돌 던지고 침 뱉으며 더럽다 말했지만, 엔젤은 그런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이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 혹은 그녀일 것이다. 엔젤에겐 성별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반이여, 나에게 오라
트랜스베스타이드 ‘프랭크 박사’
프랭크 박사.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파티에서 입었던 복장을 기억한다면, ‘이 사람이 왜 박사야’라는 의문이 당연하다. 세상의 어느 박사가 그처럼 요상한 복장을 입겠는가? 하지만 그 의문은 프랭크 박사 출생의 비밀을 알면 쉽게 납득할 것이다.
프랭크 박사는 우주 저 멀리, 은하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행성 중에 하나인 ‘트랜스섹슈얼 행성’에서 지구로 온 외계인이다. 성전환행성. 그 행성의 모든 외계인이 양성을 갖췄는지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프랭크 박사는 양성(兩性)을 갖추고 있다. 원래 그는 외딴 성에 은둔하여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성을 방문하여 난교파티를 목격하게 된, 그리고 동참했던 브래드와 자네트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브래드와 자네트는 프랭크 박사의 성을 방문해서, 당시까지 보지 못했던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파티에는 모든 이반들이 다 참여했으니까. ‘다를 이’(異)를 쓰건, ‘두 이’(二)를 쓰건 어쨌거나 일반(一般)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이반은 레즈비언과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 등 모두를 아우른다. 그러니 그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대략 상상이 되리라.
이들 중에서도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를 뽑는다면 그물 스타킹에 하이힐, 코르셋을 입은 프랭크 박사다. 프랭크 박사, 그는 진정한 ‘트랜스베스타잇 계의 챔피언’이다. 그런데도 아직 프랭크 박사를 모르겠는가? 성인식을 앞둔 미국의 청소년들의 필견(必見) 뮤지컬인 이 작품, <록키 호러 쇼>를 아직도 못 봤다면, 아쉬운 대로 영화 <록키 호러 픽쳐 쇼>를 관람해라. 트랜스베스타잇부터 세상의 모든 이반을 이해하게 될 테니.
비록 외모는 따라주지 않지만
크로스드레서 ‘로저 드브리스’
브로드웨이 최악의 연출가로 소문난 로저 드브리스가 블룸에게 묻는다.
“미스터 블룸. 내 드레스 어때요? 잔인해도 좋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난 마음의 준비 다했어.”
로저가 묻는 순간, 뮤지컬 <프로듀서스>를 관람하고 있던 점잖은 관객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마음의 준비를 하셨다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로저 씨, 솔직히 당신의 드레스는 너무나도 훌륭합니다지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당신의 모습까지도 ‘훌륭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군요. 왜 그렇게 입으셨나요? 굳이 그렇게 입으셔야 했나요? 오~ 마이 갓!’
도저히 여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뭇 남성 못지않게 건장한 ‘남자’가 드레스를 입고 있다니! 그것도 몸에 쫙 들러붙는 번쩍번쩍한 원피스 드레스를! 그게 전부가 아니다. 머리에는 클레오파트라 울고갈만한 거대한 티아라까지 쓰고 목에는 주렁주렁 목걸이까지 차고 있다. 남성미 물씬 풍기는 이 남자는 연출력은 형편없지만 부유한 재산을 거느리고 있는 크로스드레서 연출가인 로저 드브리스다. 뮤지컬 <프로듀서스>에서.
혹자는 로저 드브리스를 두고 드랙퀸 연출가라 하지만, 그는 크로스드레서다. 예쁘고 곱상한 여성으로 보이려는 그는 분명 크로스드레서다. 진정한 드랙퀸은 바로 <갬블러>의 지지니까!
이리 와, 오늘 밤 널 유혹해 줄께
드랙퀸 ‘지지’
드랙퀸이라 불리려면 적어도 <갬블러>의 ‘지지’만큼은 돼야 하지 않을까? 키는 170 센티미터에, 춤도 잘 추고 예쁘면서도 섹시함을 겸비한 지지만큼은.
명색이 드랙 ‘queen’인데, 아무리 꾸몄다지만 그래도 여왕은 여왕인데, 여왕이 될 만한 자격요건은 갖춰줘야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지는 예의바른 드랙퀸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그렇다면 직접 지지의 목소리로 그녀의 매력을 들어보자. <갬블러>의 뮤지컬 넘버 ‘Nine by Nine by Nine’에서.
“난 예쁘고 생기발랄하고 스타일 좋고 품위까지 있죠. 난 정말 끝내주는 춤꾼이 되리라 늘 생각해 왔어요. 이제 그 기회가 온 거죠. 난 머리도 감았고 다리털도 면도했어요. 게다가 나에게는 아주 끝내주는 의상도 있거든요, 믿을 수 없이 매력적인 아슬아슬한 죽여주는 옷이에요. 의상 좋고, 느낌 좋고. 노래도 외웠고, 게다가 난 예쁘잖아요.”
너무 훌륭하다 보니, 지지를 진짜 여자로 오해하는 사람을 있을까 싶은 걱정까지 든다. 노파심에서 언급하지만, 지지는 분명 남자다.
“하지만 문제가 있긴 해요. 거시기 때문에 어쩌면 좋아. 숙이고 있다가 일어서 버리면 그들이 눈치 챌 게 뻔한데. 내가 시련을 겪으면 더 강해진다는 걸 그들은 몰라.”
트랜스섹슈얼, 트랜스젠더, 트랜스베스타잇, 크로스드레서, 드랙퀸. 편의상 ‘그들’이라 칭하자.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들 각각은 이렇게 다르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그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로 비쳐질 뿐이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그런 몰이해는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다.
자웅동체를 비롯해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를 동시에 타고난다. 다시 말해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이다. 그럼에도 신체적으로 발현되는 성과 발현되지 않는 성이 다를 경우, 그들은 이유 없는 비난과 근거 없는 비판, 혹은 가벼운 놀림감이 될 뿐이다. ‘똘레랑스’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들에겐 관용적이지 않다. 세상 모든 지식과 가치를 수용하는 유연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도 그들에게 대해서는 경직된 사고로 일관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주창했던 많은 종교조차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슬픈 운명을 여기 그치지 않는다.
때로 사람들은 웃음을 위해 그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의 삶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여장남자, 남장여자를 웃음의 소도구로 이용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늘도 곱게 화장을 한다. 드랙퀸이 되어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