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끝에서 새벽을 밝히다…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출가 김민기

입력 : 2007.05.17 08:59
“한 재능 있는 시인이, 부드럽고 슬프지만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전설적인 노래를 만들던 이가 어느 날 쇼비지니스에 잘못 엮여 조그만 극장을 운영하며 뮤지컬을 만들게 되었다는 건 상당히 어처구니없게 들리지요. 게다가 그 업적을 기려 괴테 메달을 준다니 복부에 한방 얻어맞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재능 있는 시인은 바로 김민기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대표이자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는 그를 소개하며 그렇게 운을 뗐다. 지난 3월 22일 독일 바이마르에서 거행됐던 2007 괴테 메달 시상식에서. 이날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으로 한국인으로서는 네 번째 괴테메달 수상자가 되었다.
어둠에서 걸어온 시인

김민기라는 이름은 어둠과 결부되어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1971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다. 암울했던 1970-80년대 유신독재시절과 군부독재시절 김민기, 그 이름은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김민기는 고유명사를 뛰어넘어 저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집회현장에서는 그가 작곡한 ‘아침이슬’이 불려졌다. 과장을 섞자면 재야인사를 안다는 명목만으로 간첩으로 몰리던 시절에, 역설적으로 ‘김민기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그는 아우라를 가진 유명 인사였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몇몇 386세대는 그의 이름에서 혈류가 역류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포스트386세대가 대학가에 등장하고, ‘무브먼트’(movement)로 해석되던 ‘운동’의 의미가 ‘스포츠’(sports)로 전환되기 시작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94년에는 안경(극중 등장인물)을 진짜 운동권 학생으로 설정했었어요. 공연을 올리고 나서 보니 관객들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더라고요. 그 때 ‘이미 운동권의 얘긴 끝난 얘기’라는 걸 깨닫게 됐죠. 그래서 95년부터 안경을 지금의 캐릭터로 바꾼 거예요. (극중 안경은 운동권과 전혀 무관하나, 오해를 사서 정체를 숨긴 채 피신한 운동권 학생인 척 살아야 하는 인생을 연기한다.) 그게 바로 김민기를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예요. 뮤지컬 주 소비층인 20대들은 저를 잘 몰라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대풍속도가 완전히 변했고, 서태지가 처음 등장했던 91년부터 가요계도 많이 바뀌었어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대중적 성공 뒤에 ‘김민기’라는 아이콘이, 혹은 브랜드가 주는 영향력은 없느냐, 라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이다.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기는 하나, 필요이상의 겸손을 부리진 않는다. 대답대로 그의 인지도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인지도가 예전만 ‘못한’ 것이 시대변화 ‘탓’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지도가 예전 같지 ‘않음’에 대해 시대변화 ‘덕’이라 여길 수도 있다. 천성적으로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는 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석구’니까. ‘석구’는 ‘구석’을 뒤집은 그의 별명이다. 그가 인터뷰를 기피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김민기를 다룬 기사나 글에서 그의 육성을 듣기 힘든 까닭은 그가 천성적으로 사람 앞에 나서는 일도 기피하고, ‘세(勢)’를 만드는 건 더더욱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이 그 가설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야간업소 아닙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들하고는 바이오리듬이 맞지 않거든요. 그 핑계로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 잘 안가죠. 어디 파티라도 가게 되면 사람들과 명함도 나누고 대화도 나눠야 하는데, 그런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아서......”

한국 정치의 지형도가 바뀌고 나서야, 김민기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인의 뇌리에서 그의 이름은 어둠 속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김민기에 대한 약력 소개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침이슬’은 알지만 김민기는 모르는 독자를 위해. 여전히 김민기에게서 정치적 암흑기나 구석과 같은 어둠을 떠올리는 독자를 위해.
김민기, 새벽을 깨우다

1951년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민기는 그림에 재능을 보여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제도권교육에 흥미를 잃고, 그는 많은 시간을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대신 다방에서 노래 부르며 보내게 된다. 무릇 삶에는 전기(轉機)가 있는 법. 김민기에게 있어서는 이때가 그 전기가 아닐까? 1970년에 그가 작가, 작곡한 ‘아침이슬’이 발표되었고, 1971년에는 자신의 첫 앨범이 나오게 된다. 그의 노래는 잠든 세상의 새벽을 깨우는 외침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 앨범은 전량 압수되고 판금, 방송금지를 당하게 된다. 탄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국가가 한 개인에게 자행하는 폭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연행 및 영창살이 등 그의 20대는 순조롭지 않았다.

군에서 제대한 김민기는 공장과 탄광, 논밭에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주변인들에게 애정을 확고히 만드는 시기로, 그는 논밭을 갈고 김을 매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창작물을 발표했다. 도낼 ‘상록수’와 노래굿 <공장의 불빛>,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와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가 이 시기에 나온 작품들로, ‘상록수’는 공장노동자들을 위해 작곡되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되는 건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의 현판을 달면서 부터다. 하지만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기존 대학로 연극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졌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91년에 학전을 세우면서 라이브콘서트도 하고, 연극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공연을 올렸어요. 그런데 100% 대관으로 운영해도 극장은 늘 적자인 거예요. 게다가 연극을 올리면 빚이 더 커지고. 이건 뭐 자선 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자를 보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명분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소극장 학전의) 문을 닫을 생각을 했죠. 그런 생각을 하니까 문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올려보고 싶은 욕심이 난 거예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폐관기념작으로 구상했던 이 작품이 14년간 장기 롱런되리라곤 그조차 예상치 못했다. 폐관기념작이 <지하철 1호선>이 된 건 그의 삶의 내력과 무관치 않다. 대학시절부터 마당극의 효시가 된 <아구>를 집필하고,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제작하는 등 음악과 드라마가 결합된 공연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뮤지컬은 선택한 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나 당시 주류를 이루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대부분은 남녀 간의 사랑의 판타지를 다루지 않던가.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매력이 없었다. 패키지 상품처럼 깔끔하게 포장된 외관은 그렇다 쳐도, 손댈 수 있는 폭이 거의 없는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은 아무 매력이 없었다. 그렇게 찾게 된 작품이 훗날 김민기의 마스터피스가 될 <지하철 1호선>이다. 이 작품은 형식적인 면에서 그가 손댈 수 있는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지하철 1호선>이 그의 마음을 끈 건 형식보다 내용이었다. 1986년 분단 독일의 서민 정서가 1990년대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의 김민기 가슴에 와 닿았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분단 이데올로기라는 소재와 형식이 접하는 지점이 많지 않은가. 이때부터 그는 독일 원작의 <지하철 1호선>을 연구하며, 그 속에 지금 한국의 현실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새벽이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번역과 대본, 연출을 직접 맡게 된 건, 사실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인건비를 줄이고자 해서 그런 거예요. 폐관작이라지만 돈을 넉넉히 쓸 순 없었죠. 공연도 적자였어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작품을 올리고 보니 허점이 많이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적자는 났지만 허점을 고쳐야 하니까, 그렇게 고치다 보니 지금까지 온 거죠.”
밤의 끝으로 가는 고독한 나그네

“그립스의 <Linie 1>는 독일과 해외에 있는 150개가 넘는 극장에서 공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여 작품의 원래의 정신을 드러내고 표현한 사람은 김민기가 처음입니다. 1994년의 한국초연은 성공적이었고, 공연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년 후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작품을 변경하였기 때문에 내가 공연을 금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연은 정말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폴커 루드비히의 말이다. 구멍을 채우는 개작과정을 거듭하며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은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원작보다 정치적이고 시적이고 슬픈 노선을. 원작자는 이에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지하철 1호선>의 1,000회 공연 시엔 저작권료를 면제해주는 동시에 극단 학전을 독일로 초대하는가 하면, 2,000회엔 직접 극단을 이끌고 내한하여 원작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평단에서도 <지하철 1호선>은 호평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은 한국 현대사의 시대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행해지곤 했다. ‘아침이슬’에서 지금의 <지하철 1호선>까지 김민기의 작품은 늘 미학적인 관점에서보다는 정치적인 맥락에서 해석되곤 했다. 이처럼 그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읽혀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김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정치적인 인물이니까. 이때의 정치를 ‘현실 정치’로 해석하건, ‘세를 넓히기 위한 권력 지향적 활동’으로 해석하건, 그 모든 정치에서 김민기는 무관하다. 어쨌거나 <지하철 1호선>으로 노래하는 시인 김민기는 연출가로서도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94년 초연 후 <지하철 1호선>은 2007년 5월 현재 3400회를 넘는 운행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지하철 1호선>의 성공 뒤에는 원작의 힘과 개작의 힘도 존재했지만, 배우를 비롯한 극단 식구들의 조력도 무시할 수 없다. 천성적으로 ‘세’를 이루기 싫어하는 김민기지만 어느덧 그는 배우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문화계에 일가(一家)를 이루게 된 것이다. 지금 대스타가 된 황정민과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 방은진 등의 배우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 <지하철 1호선>에서 연기력을 배양했다. 배우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가르침은 주로 말보다는 침묵으로 이뤄진다고 하는데, 실제로 김민기의 느릿느릿하면서도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말투는 듣는 이를 집중시키는 동시에 긴장시키는 은근한 힘을 가지고 있다.

김민기가 배우들로부터 ‘선생님’으로 존경받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매일매일 그날의 관객수와 그중 유료관객수를 배우들에게 알려주고, 수입을 형평성을 고려해 동등하게 배분한다고 한다. 단원의 월급이 밀려 본 적이 없고, <지하철 1호선> 출연 당시 설경구는 김민기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김민기의 아우라는 바로 그런 모든 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까지 <지하철 1호선>이 운행될 수 있었던 에너지는 바로 거기 있다.

오늘도 <지하철 1호선>은 달린다. 아마도 에너지가 남아있는 한 ‘지하철 1호선’의 연장운행은 계속 될 것이다. 그것은 김민기보다 관객이 더 바라는 사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민기는 다시 또 빛이 들지 않는 극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둠 속을 뚫고 달리는 <지하철 1호선>을 운행하기 위해.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는 서민들을 태우고. 그들의 꿈을 싣고. 어둠 끝의 빛을 향해 오늘도 <지하철 1호선>은 달린다. 김민기는 달린다.

▒ 김민기 프로필 ▒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 출생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1970년 ‘아침이슬’ 발표
1971년 음반 <김민기> 발표
1971년 신정동에 야학시작,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에 참가 연극지도
1973년 <금관의 예수> 공연
1974년 소리굿 <아구> 공연
1978년 음반 <저 푸른 들판의 솔잎처럼> 발매
1978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 작사, 작곡 완성
1980년 극단광대 창립 기념공연 기획 참가
1981년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공연
1983년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극본, 연출
1985년 프랑스 퐁피두센터 ‘한국 페스티발’ 총연출
1987년 음반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1988년 음반 <엄마, 우리 엄마> 발표
1991년 소극장 학전 설립
1992년 <겨레의 노래> 총감독
1992년 음반 <김민기 1,2,3,4집> 발표
1994년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번안, 연출 (1994-2007)
1995년 노래극 <개똥이> 작사, 작곡, 연출  (1995, 1997, 2007) 
1998년 뮤지컬 <의형제> 번안, 연출  (1998, 2000, 2001)
1999년 록뮤지컬 <모스키토>  번안, 연출  (1999, 2000, 2004)
2004년 학전 어린이 무대1 <우리는 친구다> 번안, 연출 (2004-2007) 
2004년 음반 <past life of KIM MIN‘GI> 발표
2004년 노래굿 음반 <공장의 불빛> 발표


▒ 수상경력 ▒
1995년 한국평론가 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뮤지컬 <개똥이>
1996년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 수상;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1998년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 5> 단체상, 번안상; 뮤지컬 <의형제>
1999년 제 35회 동아 연극상 작품상; 뮤지컬 <의형제>
2000년 제 6회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2001년 제 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뮤지컬 <의형제>
2003년 제 1회 외신공로상 공연부문 수상;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2005년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 선정
2007년 독일연방공화국 훈장 괴테메달 수상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