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편만 '보고 또 보고'… "100번은 봐야 광팬 대접 받죠"

입력 : 2007.05.14 12:53

'뉴 트렌드' 마니아 뮤지컬
'헤드윅' '쓰릴미' '그리스' 등 장기 반복공연
팬들 대부분 20대 여성…객석 98%까지 차지

헤드윅

"이 공연 보는 게 직업이에요."


뮤지컬 '헤드윅' 공연장(대학로 SH클럽)에서 만난 한 뮤지컬 팬의 말이다. 회사원 강연희씨는 "지난해 10월 시작된 '헤드윅 시즌3' 공연만 100번 넘게 봤다"고 말했다. 전체 공연의 절반 정도를 본 셈이다. 강씨는 6월 초 시작되는 부산공연도 볼 계획이다.


지난 3월 시작된 '쓰릴 미'도 벌써 40번 이상 본 관객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공연된 '알타보이즈'는 80회 전회를 본 관객도 있다. 이런 마니아들은 워낙 여러 번 보다보니 팬들끼리 친해져 공연장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마니아 뮤지컬'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 뮤지컬의 새 흐름이다. 보통 팬들은 여러 뮤지컬을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본다. 이렇게 수십 편의 뮤지컬을 보는 것과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한두 편만 집중적으로 '보고 또 보는' 팬들이 있다. 이들 열성팬이 선호하는 작품이 '마니아 뮤지컬'이다. '헤드윅'과 '쓰릴 미'가 대표적이다.

쓰릴 미

이들 '마니아 뮤지컬'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 소극장의 생생한 현장감


우선 소극장 뮤지컬이다. 팬들은 배우들의 작은 몸짓, 거친 호흡,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다. 중, 대형극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이다. 배우와 관객이 교감을 나누는 것도 장점이다.


또 '배우의 힘'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대작 뮤지컬과 달리 출연배우가 매우 적은데 '헤드윅'은 밴드 포함 6명, '쓰릴 미'는 2명이다. 한두 명의 배우들이 작품을 이끌어간다. 무대, 음악, 조명 등이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대작 뮤지컬과 다른 점이다.



▶ 동성애, 트랜스젠더…독특한 소재


독특한 소재를 다루는 점도 '마니아 뮤지컬'의 특징이다. 말랑말랑한 멜로, 현란한 춤이나 음악, 화려한 무대세트로 승부하지 않는다. 탄탄한 스토리를 앞세운다. 연극성이 강하다.


'헤드윅'은 동독 출신 트랜스젠더 로커 이야기다. 그의 성전환 수술과 굴곡많은 삶이 그대로 전해진다. '쓰릴 미'는 동성애, 어린이 유괴, 살인이 등장한다. 동성애자의 애증과 집착이 부른 비극을 리얼하게 풀어간다. 금기시됐던 소재들이다. '밑바닥에서' 역시 러시아 시골의 선술집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우울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팬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쓰릴 미'에 출연 중인 김무열은 이런 현상에 대해 "국내 뮤지컬 팬들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다. 앞으로 더 다양한 소재가 뮤지컬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꽃미남 배우, 20대 여성팬들


'마니아 뮤지컬'의 팬은 대부분 20대 여성들이다. 원래 20대 여성들이 뮤지컬 팬의 주류지만, '마니아 뮤지컬'은 그 정도가 심하다. 객석의 98% 이상을 채운다. 한 여성팬은 "꽃미남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마니아 뮤지컬'은 신인발굴의 장이기도 하다. 장기간의 반복 공연을 통해 무명의 신인들이 뮤지컬 스타로 발돋움했다. 송용진 엄기준 오만석 조정석 김다현 이석진 김무열 이율 등이 '헤드윅', '그리스', '쓰릴 미' 등을 통해 주연급으로 성장했다.


팬들만 '마니아 뮤지컬'에 빠져 있는게 아니다. 배우가 한 작품의 팬이 되기도 한다. 2005년부터'헤드윅'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송용진은 "국내에서 '헤드윅'이 공연되는 한, 나는 영원히 헤드윅으로 출연할 것이다"고 말한다.



▶ 아르바이트-투잡스에 적금도 깨고


'마니아 뮤지컬' 팬들은 공연을 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직장인은 투잡스족이 되고, 학생들은 아르바이트에 매달린다. 적금이나 펀드를 깨기도 하고, 해외여행 대신 공연장을 찾는 경우도 있다. 후유증(?)도 있다. 정신적 공백이다. 대학생 김민선씨는 "지난해 '헤드윅'이 끝난 뒤 그 극장에 다른 공연 안내판이 붙어있는 걸 보고 '왜 저게 있지. 헤드윅을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 강한 중독성…뮤지컬 발전에 도움


'쓰릴 미'의 제작사인 해븐의 선다인 기획실장은 "중독성 강한 공연들에 순수 마니아들이 빠져드는 현상이다. 미국, 영국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한국 뮤지컬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고 전망한다.


이같은 '마니아 뮤지컬'은 90년대에 시작됐다. '지하철 1호선'이 첫 작품으로 꼽힌다. 이어 '사랑은 비를 타고'와 '그리스' '지킬박사와 하이드' '김종욱찾기' '알타보이즈'로 확산됐다. '바람의 나라'도 만화 팬들을 중심으로 마니아 층이 형성돼 있다.


폐해가 없는 건 아니다. 열성 팬들이 티켓 오픈이 되자마자 좋은 자리를 입도선매하거나, 공연의 '공식'을 만들어놓고 이에 따르지 않는 관객에게 눈총을 주기도 한다. 캐스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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