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환상동화'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로 사악하다. -정미경, ‘모래폭풍’ 중에서
어렵사리 마리가 있는 카페를 찾아간 한스가 만약 마리 친오빠의 사망통지서를 곧이곧대로 읽었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오빠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마리를 동정하고 위로해주면서 한스와 마리가 연인관계로 발전했을 수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하지만 한스는 그 순간 재기를 발휘해 사망통지서대신 오빠가 생전에 마리에게 썼던 사랑통지서를 읽어 준다.
때로는 가혹한 진실보다 감추어진 거짓이 나을 때가 있는 법이다. 거짓은 금해야 할 악덕으로, 환상은 비생산적인 행위로 취급되곤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 상처를 내는 건 거짓의 칼집이 벗겨진 날 선 진실이며, 인간에게서 생의 의지를 빼앗는 건 환상을 폐기한 현실이다.
연극 <환상동화>는 폭음(爆音)으로 인해 청력을 잃은 음악가 한스와 폭광(爆光)에 시력을 잃은 무용수 마리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작품이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신체적 장애는 어떤 장애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스는 마리에게 눈이 되어주고, 마리는 한스에게 귀가 되어줌으로써 서로에게 장애로 인해 잃어버렸던 예술적 영감을 되찾아 준다. 유일한 장애물은 두 연인이 교전 중인 두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뿐. 그마저도 두 사람을 갈라놓지는 못한다. 정작 이보다 더 큰 갈등은 한스가 본국인 독일로 도망치지 않을 경우, 연합군에게 사형을 당하게 되는 현실이다. 이번에도 <환상동화>는 제목에 걸맞게 비참한 현실을 환상으로 극복하게끔 만든다. 그런데 그것이 다만 연극적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어차피 인간이란 언젠가 죽기 마련인 유한한 존재. 사는 일은 죽음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며, 산다는 건 결국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달려간다. 달려가지 못하면 걸어서라도, 걸을 기운조차 없으면 기어서 앞으로 나가는 게 인간이고, 그것이 포월이다. 뛰어넘는 초월(超越)이 아닌 기어넘는 포월(砲越). 포월하는 존재 인간. 그렇게 기어서라도 인간을 전진하도록 만드는 생의 의지는 바로 환상에서 나온다. 가벼워 날아가 버리는 가상(假想)도, 무거워서 가라앉아 버리는 이상(理想)도 아닌 환상(幻想)에서. 연극 <환상동화>는 바로 그런 생의 의지를 가진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환상’이라는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이 작품에는 세 명의 광대가 등장한다. 각자 ‘현실보다 잔혹한 환상’인 전쟁과 ‘현실조차 망각할 환상’인 사랑과 ‘현실을 닮은 고귀한 환상’인 예술을 상징하는 전쟁광대와 사랑광대, 예술광대가.
이들 세 명의 광대가 극중극으로 펼치는 작품이 바로 ‘한스와 마리의 러브 스토리’다. 때로 극중극의 해설자로, 때로 극중극의 등장인물로 작품의 안팎을 드나드는 광대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연극 <환상동화>가 관객을 끄는 힘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전쟁과 예술, 사랑의 세 가지 주제를 환상적인 방식으로 빚어내는 형식에서.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는 헬륨풍선 같은 환상으로서가 아닌, 땅바닥에 닿을 듯 말듯 공중 부양하는 환상으로서의 형식에서. 연극 <환상동화>는 현실세계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존재 가능성 없는 가상을 그리지 않는다. 반대로 현실세계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존재의 당위성을 부르짖는 이상을 그리지도 않는다. 대신 연극 <환상동화>는 환상과 현실의 접점을 넓히며 환상현실을 그려낸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것이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걸로 착각해왔지만, 사실 그 환상현실은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바로 여기다.
“꿈꾸는 자에게 동화는 동화책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고 환상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들은 꿈을 꾸었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불완전하여 절뚝거리면서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기어가더라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숨 쉬는 바로 이곳이 환상현실이며,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환상동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