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왜곡과 노이즈… 김영헌의 화면은 울린다

입력 : 2025.01.02 15:57

김영헌 개인전 ‘공명의 순간 Moments of Resonance’
신작 비롯한 회화 30여 점
1월 9일부터 2월 15일까지 광화문 ACS(아트조선스페이스)

P22062-Electronic Nostalgia, 2022, oil on linen, 100×100cm. /아트조선
P22062-Electronic Nostalgia, 2022, oil on linen, 100×100cm. /아트조선
SMPTE 컬러바. /SMPTE
SMPTE 컬러바. /SMPTE
 
삐이이-. 과거 아날로그 TV에는 가끔 조정화면이 등장했다. 선명한 색의 대비와 줄무늬의 간격. 삐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재생되는 정지 화면일 뿐인데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멍하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 지지직- 하는 노이즈가 화면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색색의 줄무늬가 가늘게 진동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화면 밖으로 이동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 노이즈를 찾기 위해 조정화면을 흥미롭게 지켜봤던 이가 아마 한둘은 아닐 것이다.
 
김영헌 작가는 자신만의 색감과 추상적 형태로 회화적 노이즈를 표현한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김영헌 작가는 자신만의 색감과 추상적 형태로 회화적 노이즈를 표현한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P22045-Electronic Nostalgia, 2022, oil on linen, 97×130cm. /아트조선
P22045-Electronic Nostalgia, 2022, oil on linen, 97×130cm. /아트조선
 
김영헌은 모든 것이 선명한 첨단 기술보다 불규칙하고 인간적인 노이즈를 사랑하는 작가다. LP판 위에 바늘이 올려질 때 발생하는 작은 노이즈, 필름영화에서 만져지는 빛의 질감, 깨끗한 음원보다 가수의 거친 라이브 공연무대, 수십 번의 촬영을 통해 완성된 영상 매체보다 무대 위 배우의 손끝 떨림까지 전해지는 단 한 번의 연극무대가 더 소중할 때가 있다. 김영헌의 작품도 그렇다.
 
김영헌 개인전 ‘공명의 순간 Moments of Resonance’이 1월 9일부터 2월 15일까지 광화문 ACS(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최초 공개되는 신작을 포함한 작품 3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대작과 소품이 같은 벽면에 내걸려 관람객에게 보다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색감부터 크기, 제작 시기까지 제각기 다른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다.
 
‘공명’은 외부에서 진동을 가했을 때 고유진동수와 외부에서 가해주는 힘의 진동수가 같으면 진동과 진폭이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전시 제목 ‘공명의 순간 Moments of Resonance’은 완벽한 모습으로 정지하기보다 불완전한 울림을 택한 김영헌의 작품 세계를 포괄한다. 의도적으로 빈틈을 만들고 왜곡시킨 아름다운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다가간다. 김영헌의 울림이 관람객에게 닿는다면 그 순간부터 공명의 순간이 시작될 것이다.
 
작업실 전경.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작업실 전경.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P24001-Electronic Nostalgia, 2024, oil on linen, 150×150cm. /아트조선
P24001-Electronic Nostalgia, 2024, oil on linen, 150×150cm. /아트조선
P24005-Electronic Nostalgia, 2024, oil on linen, 100×80.5cm. /아트조선
P24005-Electronic Nostalgia, 2024, oil on linen, 100×80.5cm. /아트조선
 
─ACS(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2025년 첫 전시로 개인전을 선보이게 되셨는데요. 이번 전시 출품작이 궁금합니다.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운 연작을 선보입니다. 과거부터 조금씩 발전시켜 오다가 이번에 본격적으로 집중하면서 작업을 했고, 이제는 보여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했고, 성과도 어느 정도 발견했거든요. 특히 과거 작업과는 달리 물감의 양을 늘려 두께에 변화를 줬습니다. 그 연작 외에도 제가 기존에 작업해 오던 작품들이 포함될 예정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아날로그 TV의 조정화면을 무심코 바라봤던 적이 있습니다. 색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줄무늬와, 중간중간 등장하는 노이즈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작가님의 이번 전시 출품작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작품의 근간에는 무엇이 있나요? 이토록 신비롭고 매력적인 작품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가요?
 
제가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주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아주 작은 존재잖아요. 거기서 느끼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중력 같은 개념은 우리 일상에서 고정관념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개념들은 아주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도출된 결과고, 또 우리가 모르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중력이 시공간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4차원에 대한 개념이라든지 일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관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전위예술가 집단인 플럭서스(Fluxus)가 아날로그 TV의 자기장으로 영상 왜곡 실험을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실험 속 아날로그 TV의 줄무늬는 출렁거리며 진동했습니다. TV 화면 속 이미지를 외부의 개입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아주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또 디지털 TV를 보다 보면, 간혹 위성신호가 불안정해 선명한 원색의 노이즈가 화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화면이 멈추거나 끊어지며 어긋나기도 합니다. 결국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거기서 볼 수 있는 왜곡과 노이즈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부분은 제 작품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작품 속 화면을 보면 줄무늬가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데, 거기서 어떤 중력의 왜곡이나 시공간의 왜곡 같은 부분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봤던 자유로운 힘의 작용들. 비틀어지고 갈라지고, 늘어났다가 당겨졌다가 하는 힘의 작용들이 제 작업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P24038-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00×80cm. /아트조선
P24038-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00×80cm. /아트조선
P24042-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30×97cm. /아트조선
P24042-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30×97cm. /아트조선
P24041-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62×130cm. /아트조선
P24041-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62×130cm. /아트조선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TV의 조정 화면이나 모니터 노이즈 같은 요소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AI나 컴퓨터 그래픽이 발전해 감쪽같이 눈을 속이고는 하는데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작가님은 어떤 새로운 영감을 얻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최근에는 디지털 화면 속 왜곡과 변형이 축소되고 복제품과 원본의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받아들이는 신호나 사진 같은 것들이 너무 깨끗하고 선명하죠. 쨍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저는 때로는 그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오래된 필름 영화에서 보이는 빛의 입자나 LP를 재생할 때 들리는 자연스러운 노이즈 같은 것들이 저한테는 더 자연스럽고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너무 깨끗하고 선명한 화면이 가득한 지금 시대에 저는 오히려 적당한 노이즈나 왜곡을 작품에 담아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곡을 만드는 파장들, 잡음들을 회화적 전환을 통해 제 그림에 표현합니다. 회화적인 노이즈를 즐기는 셈입니다. 그런 다양한 변수는 사실 자연의 요소거든요. 그 부분을 끌어들여서 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회화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호부터 10호까지 다양한 크기의 작품이 내걸려 다채로운 전시 경험을 의도했다고 들었습니다. 대작과 소품을 작업할 때의 차이가 있나요?
 
아주 큰 화면 앞에 마주할 때면 막막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많습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고, 어떻게 이 작품을 끌고 갈 것인지. 그런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처음 붓을 올렸을 때부터 마지막 완성까지 몇 년이 걸리는 작품도 있습니다. 그만큼 대작은 많은 생각을 요구하고 연구를 지속해야 하는 부분이 있죠.
 
반면, 소품의 경우에는 작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만을 보여주기 위해 축약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작은 작품과 큰 작품을 병치시켰을 때, 작은 작품에서 나오는 압축된 느낌과 큰 작품에서 느껴지는 다채롭고 광활한 감각이 재미있는 미술적 경험을 관람객분들께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 클로즈업. /아트조선
작품 클로즈업. /아트조선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김영헌 작가의 모습. /아트조선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김영헌 작가의 모습. /아트조선
김영헌 작가가 나이프를 사용해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김영헌 작가가 나이프를 사용해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최근에 선보였던 큰 붓을 이용한 작업과는 달리, 이번 신작에서는 보다 작은 붓으로 세밀하고 깊은 표현에 집중하셨습니다. 큰 붓으로 작업하는 것과 작은 붓으로 작업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표현이 많이 달라집니다. 제 작업은 붓 하나에 여러 가지 색을 묻혀 사용하기 때문에 붓이 커지면 그만큼 색의 종류, 질감, 물감의 양 등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밀도 있게 뭔가를 표현하고 싶을 때는 5mm 너비의 작은 붓도 쓰지만 50cm가 넘는 커다란 사이즈의 붓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번에 보여드릴 작업에서는 밀도를 끌어올리는 것에 많이 신경썼기 때문에 작은 붓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작품을 보면 배경은 상대적으로 묽게 칠해지고, 그 위에 올라간 선은 물질적으로 무겁게 칠해졌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런 대조를 의도하신 건가요?
 
사실 배경을 묽게 칠하기보다는 나이프를 사용해서 넓게 펴발랐습니다. 반면 그 위에 올려지는 선은 자연스레 형성된 붓 자국까지 의도한 것이기 때문에 단 한 번의 터치로 완성이 됩니다. 그런 표현을 위해 물감의 양을 많이 사용하게 됐고, 그래서 무겁고 밀도 있게 칠해졌다는 인상을 받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물질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시각적인 경험을 선사하고자 했습니다.
 
P24008-Electronic Nostalgia, 2024, oil on linen, 122×122cm. /아트조선
P24008-Electronic Nostalgia, 2024, oil on linen, 122×122cm. /아트조선
P24034-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50×150cm. /아트조선
P24034-Frequency-SJ, 2024, oil on linen, 150×150cm. /아트조선
김영헌 작가의 모습. /아트조선
김영헌 작가의 모습. /아트조선
 
─이번 신작 시리즈는 특히 색감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전작에서는 형광빛의 컬러가 주를 이뤘다면 신작에서는 차분한 색감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는듯 한데요. 이러한 변화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색의 변화가 크게 의미있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색을 덮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물감의 사용량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평소 쓰던 양 대비 다섯 배에서 열 배까지 늘렸습니다. 어떤 한 가지 색에 집중하기보다는 색의 배열이나 대비 같은 부분에 더 신경 썼습니다. 그렇게 한 화면 안에서 여러 요소를 중첩시키고 충돌시키면서 의도적인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눈여겨 볼 작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실 개인의 미적 경험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제가 하나로 규정짓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쓴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요. 배경과 줄무늬가 보색을 띠고, 물감의 양을 늘린 신작 위주로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캔버스에 배경을 먼저 칠하고, 그 위를 배경과 반대되는 색의 물감으로 두텁게 덮었습니다. 그럼에도 물감 사이에 틈이 있고, 그 틈새를 통해 먼저 칠한 배경의 색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대조를 통해 왜곡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을 잘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제 작업에서 느꼈던 부분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미술적 즐거움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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