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7.19 14:35
'완전히 선한 역이 존재하는가?'
개인전 ‘몽타쥬: 모든 동화에는 근사한 악당이 필요해’
핸드페인팅, 글레이징 등 다양한 기법 활용한 신작
7월 26일부터 8월 17일까지 광화문 ACS(아트조선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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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을까? 미디어 속 대부분의 악당은 재미와 긴장감을 형성하며 극의 전개를 돕고 후반부에는 주인공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사라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7월 26일부터 8월 17일까지 열리는 작가 박기웅(39) 개인전 ‘몽타쥬: 모든 동화에는 근사한 악당이 필요해’는 일명 ‘빌런’으로 불리는 캐릭터의 이면을 조명하며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악당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똑바로 바라볼 뿐. 21년 차 배우이기도 한 박기웅은 드라마 ‘추노’, ‘각시탈’, 영화 ‘최종병기 활’ 등 여러 작품에서 악역을 도맡아 뛰어난 연기력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박기웅은 연기를 하며 선과 악의 고정관념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다. 악역은 극 중의 주변 상황으로 인한 오해로 빌런이 되기도 한다. 그들 삶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면 보이지 않았던 색다른 지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박기웅은 전통적인 악당의 개념을 고찰하고 재해석한다.


서울 중구 ACS(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라이온킹’의 스카, ‘알라딘’의 자파,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의 크루엘라 등 다양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한다. 마치 현상 수배 전단처럼 벽면을 가득 채운 악당의 초상화 연작은 녹색의 글레이징 기법으로 역동성을 부여했고, 50호 작품에서는 핸드페인팅 기법을 활용해 작가만의 섬세한 감정과 상상력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은 애니메이션에서 차용된 악당을 보며 평소 알고 있던 캐릭터를 발견할 수도 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력적인 악당을 만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고자 박기웅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아래는 함께 나눈 대화를 문답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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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 제목인 ‘몽타쥬’가 전날 꾼 꿈에서 비롯됐다고요.
네, 원래 논의 중인 다른 제목이 있었는데, 꿈속에서는 제가 ‘몽타쥬’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잠에서 깨고 보니 그 제목이 자꾸만 생각이 났고, 곱씹을수록 좋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안드리게 됐습니다.
사실 몽타주는 범인의 얼굴을 표상하는 이미지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뜻은 따로 촬영된 화면을 떼어 붙이면서 새로운 장면이나 내용을 만드는 기법에 대한 영화 용어예요. 프랑스어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단어가 제 작업에 대한 중의적인 표현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는 영화나 드라마를 연기해 왔고, 악당의 얼굴이 담긴 작품을 그리는 작가죠. 이번 전시 제목이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려 수많은 관람객을 동원했던 작가님의 세 번째 개인전 ‘48VILLAINS’에 이어 이번 전시 ‘몽타쥬: 모든 동화에는 근사한 악당이 필요해’ 역시 너무나 매력적인 악당이 화폭에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악역을 비롯해 배우로 활동하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 제 배우 활동에서는 악역보다 선한 역을 더 많이 연기했습니다. 근데 악역을 연기할 때 더 많이 조명받았고, 그래서 악역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많았죠. 최근에는 ‘크루엘라’나 ‘조커’처럼 스핀오프 작품도 등장하며 악역의 인생과 이면을 궁금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듯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작품 내에서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도 비교적 덜 주목 받는 악역이 많았습니다. 이런 지점이 쌓여 악당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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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번 전시는 저번 전시와 다르게 출품작이 모두 신작으로 구성됐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이번 전시의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요?
지난 전시에서는 “‘매트릭스’ 속 스미스 요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때는 제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한 전시였다면 이번 전시는 세계관이 확장되며 모든 사람을 관통하는 주제로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각시탈’의 기무라 슌지라는 캐릭터인데요. 기무라 슌지는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인 청년이었어요. 그러나 여러 사건을 겪으며 나쁜 마음을 먹게 됐죠. 저는 이 캐릭터를 연기하며 기무라 슌지를 이해해 버렸습니다. 기무라 슌지는 객관적으로 ‘정말 나쁜 놈’인데 말이죠. 그 간극이 힘들었지만, 동시에 “제 작품을 보는 많은 분들도 이런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때로는 꿋꿋이 고집하며 싸워나갔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지 않았을까요? 그간 여러 곳에서 보였던 선과 악 같은 이분법적 구도 대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이번 전시의 보다 더 확장된 세계관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추가로 기법적인 면에서 말씀드리자면, 지난 작업에서는 원형 그대로 인물을 묘사해 감정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며 제 해석을 더했습니다. 특히 핸드페인팅 기법으로 작업한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조색을 마친 후 캔버스에 물감을 올렸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캔버스 위에서 조색을 해나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린다는 행위보다는 조형한다는 행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며 저번 전시보다 더 나아가 진화한 작품을 선보이고자 했습니다.

─기법적으로 무채색 화면 위 글레이징 기법으로 채색된 초록색 계열의 터치가 특히 인상깊게 느껴졌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글레이징 기법은 제가 올 초에 중국에서 전시를 했을 때 이런 빌런 시리즈 말고 다른 시리즈에서 썼었던 기법인데요. 영화를 찍을 때 보시는 분들은 후보정만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알아보면 매트 박스라는 카메라 장비에 필터 유리를 끼고 촬영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저는 여기서 영감을 받아서 글레이징 기법을 일종의 필터 유리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녹색은 빌런의 색이라고 저 스스로 해석을 하고 있었고요.
─녹색이 빌런의 색이라고 설명 하셨는데, 자세히 보면 초록색이 다 같은 초록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차이를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물이나 환경에 따라 매트 박스 앞 필터유리를 바꿔 끼우듯이, 저 또한 그렇게 작업했습니다. 글레이징은 보통 투명도가 높은 안료로 작업을 하는데요, 저는 비교적 불투명한 물감도 써보고, 색 온도도 조금씩 바꿔보는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관람객분들에게 최대한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주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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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전시에서는 영화 속 악역을 다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만화 속 악역이 등장합니다. 대중문화 속 악역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가 대중문화예술인으로 지내왔기 때문이죠. 저는 항상 솔직하고자 하는데요. 제 작업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저만의 언어로 설명을 드리려면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하는 듯합니다. 따라서 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과감하게 차용해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대중문화 속 악역도 수많은 캐릭터가 있는데, 작가님께서 악역을 선정한 기준이 궁금합니다. 어떤 이유로 캔버스로 옮겨오게 된 걸까요.
우선, 지난 전시에 대해 설명 드려야겠는데요. 지난 전시 악역 여러 명을 다뤘는데, 그 안에서도 주연과 조연이 나뉘었습니다. 저는 동등하게 보이기 위해 같은 사이즈, 같은 액자를 사용했는데도요. 그 점이 재미있는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시 역시 꽤나 공평하게, 비교적 조명 받지 않은 캐릭터도 선정했는데 관람객께서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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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의 태도에 대해 질문드리려고 합니다. 회화와 연기는 몸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움직임과 대사의 과정이 모두 작품이 되는 연기와는 달리 회화는 붓이 움직인 결과물만이 작품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배우’와 ‘작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또,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신가요?
무엇보다 과정이 다릅니다. 공동작업과 개인작업이죠. 배우는 작품 안에서 주제가 되기도 하고 부주제가 되기도 하며 많은 분과 협업을 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습니다. 미술작가는 대부분 혼자 세계관을 성립하고 작업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점이 다른 듯합니다. 그 과정에서 신기했던 건, 배우인 저와 작가인 제가 분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업 초창기엔 분리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저는 배우로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왔는데, 제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무시하고 작업한다면 그건 모순이죠. 그래서 배우와 작가를 뚜렷하게 구분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제가 가진 세계관을 선보이면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밀도가 많이 쌓여서 빼곡한 작품을 보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고 작품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반면 저는 비워내면서 완성해 가는 태도를 닮아가고 싶습니다. 그런 지점을 염두하며 많은 분께 공감과 즐거움을 이끌어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