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4.26 10:40

단색화는 ‘회화의 출발’로서의 추상화
신기하게도 단색화 이야기는 모노크롬 이야기와 다르다. 회화의 종착점에 다다른 모노크롬이 차마 소멸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바로 그 때, 서양 미술의 과거 유산이 거의 해체된 바로 그 시점에 단색화는 시작됐다. 모노크롬은 계속 진행된 ‘축약 궤도’의 끝에 있었지만, 단색화는 새로운 추상화를 향한 ‘건설 궤도’의 출발점에 있었다. 모노크롬과 단색화는 서로 다른 역사를 지녔다. 단색화 작가들은 이 역사적 구성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단계적 이행이 아닌 ‘압축’을 통한 따라잡기
단색화 작가들은 대부분 서양화를 전공했고 한국전쟁(1950-1953) 직후인 1950년대 중후반 붓질과 몸짓으로 전쟁체험을 표출하는 듯한 추상화로 미술계에 데뷔한 후 각자 다양한 학습과 실험 과정을 거쳤다. 1970년대가 시작했을 때, 단색화 작가들은 대략 15년~20년의 작업 경험을 거쳐 매체를 다루는 능력이 일정 수준에 올라와 있었고 독자적인 창작 어휘에 몰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바로 이 즈음, 이들은 비슷한 작업 경향을 공유하는 추상 작가 그룹으로 떠올랐다.
미술계에 데뷔한 후 각자의 작업 주제를 찾기까지 걸린 기간 동안 단색화 작가들이 하게 된 특이한 경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색화 작가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파괴적 체험을 통해 과격하게 축약된 추상화에 급도착했다. 즉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후 반세기 가량 축적된 전통 서양화의 사실주의가 혁명적으로 해체된 사건과 맞먹는 경험을 단색화 작가는 전쟁을 통해 단숨에 받아 들이고 흡입했다. 한방에 몰아서 근대 미술사를 배우는 ‘집중 강좌’와 비슷했다. 전쟁 직후 앙포르멜 스타일이라고 불리웠던 그들의 그림은 사실주의적 재현에 반항하며 극단적 뺄셈을 표현한 추상화였다. 몇백년 동안 유효했던 서양화의 과거 문법이 허물어진 새로운 문법의 추상화로 광폭 이전하면서 단색화 작가들은 순식간에 근대 회화의 속성을 체험적으로 알게 됐다. 그뿐 아니라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미술잡지를 통해 서양의 동시대 미술 경향과 평론도 접했다. 특히 뉴욕의 20세기 중후반을 수놓았던 추상 표현주의, 하드 에지, 옵 아트, 팝 아트, 기성품의 미술화, 개념미술에 대한 정보가 작가들 사이에 왕성하게 퍼지면서, 서양 미술의 현재 주소까지도 섭렵하였다. 한국 작가의 현실이었던 이 ‘압축’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의 평론은 한국의 모더니즘은 서양보다 훨씬 늦게 시작했다고 하면서, 한국 미술이 서양 미술사가 전개된 단계를 하나씩 밟으며 발달할 거라는 추정 속에서 한국현대미술을 설명하려고 한다. 국내 평론도 똑같은 취지로 말했다. 1970년대 말 단색화에 대한 비판이 평론계에 불자, 평론가 박용숙은 “오늘의 한국 미술은 아카데미즘의 전통이 없는 가운데 추상양식과 전위미술이 판을 치고 있다. […]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 원리와 원형을 재확인하는 일”이라고 했다. 즉 한국 추상화는 필요한 단계를 하나씩 밟지 않고 갑자기 추상화로 순간 이동했으니, 아카데믹 풍의 사실주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의 현실을 꿰뜷지 못하는 먹물 평론의 전형이다.


서양 근현대미술에 대한 비평 의식: ‘덜’과 ‘더’의 결합
이 ‘압축’ 수업으로 인해 단색화 작가들은 서양 근현대 미술사를 바라보는 어떤 일정한 관점을 갖게 됐다. 서양의 근현대 미술사가 무심코 현재의 상태로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서양 미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어떤 철학이나 태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에 단색화 담론을 창출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 고(故) 박서보 화백은 서양 미술의 전개 양상을 지배하는 내적 논리는 과거 미술을 뒤집고 선례의 규칙을 파괴하여 새로운 미술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서양 미술사를 논리적 사고에 의해 계속 이어진 부정의 화집(畵集)이라고 보았다. 이런 판단 하에서 그는 한국 작가는 서양식 사고 방식과 다르게 사고하는 강점이 있으며, 작업에 임하는 태도가 서양 미술가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그리고 그와 맞선 한국 작가들의 작업 태도에 관한 박서보의 이런 견해는 단색화 작가들 사이에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사에 새로운 영역을 확립해야 한다는 강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목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역사관 – 서양 미술의 한계와 한국 미술의 상대적 강점을 파악하려는 의도 속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목적론적 역사관 – 을 갖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양 미술 대(對) 한국 미술’이라는 이분법적 역사 의식을 갖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역사 의식이 서양 미술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관찰하도록 도와주었다. 단색화 작가들은 서양 미술을 ‘헐벗은 듯한 최소함’에 도달하게 한 논리와 작업 태도로부터 이탈하여, 서양 미술과 차별화된 미술을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작업했다. 다시 말해 단색화 작가들의 창작 동력은 비(非)논리적인 믿음에서 나왔다. 1970년대 당시 젊은 후배 작가였던 이동엽은 “서구 환원주의에 편승하면, […] 모더니스트가 되고 자격증이 부여되는” 평론계 풍조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덜 모더니스트”라는 오해를 받은 것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미국에서는 색채평면추상이 벌써 끝났어? 아냐! 우리 그림은 현대회화로서 제대로 그려 본적이 없는데?”라며 “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6 색면 추상도 끝났다는 평론의 논리에 수긍한다면, (서양)회화의 본고장인 곳에서 회화가 끝난 마당에 회화를 시작한다는 생각은 무모한 도전이다. 그런데도 그는 시류를 거슬리며 새로운 회화를 꿈꿨다. 박서보는 전쟁의 상처를 곱씹으며 회화적 요소를 파괴하는 작업을 그만 두고 ‘새로운 회화의 건설’을 시작해야겠다고 했다.7 하종현도 일련의 개념미술적 실험을 끝내고 “회화로 돌아갔다”라고 회상했다. 즉 1950년대와 1960년대 재현을 극단적으로 파괴하거나 기성품을 활용한 개념적 작업에 몸담았던 왕년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회화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지난 과거 수백년 동안 변치 않았던 미술의 화두 - 화가로서 매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 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단색화 작가들은 사실주의적 재현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새로운 조합을 통한 새로운 추상화의 건설이었다. 라일리(Bridge Riley)에 따르면 “모든 화가는 선, 색, 형태같은 요소들을 갖고 그림을 시작하고 이 요소들은 이것을 갖고 만들어 낼 수 있는 회화적 경험과 연관시켜 볼 때 근본적으로 ‘추상적’이다. 즉 화가가 생각하는 추상의 의미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고 했다.8 따라서 이러한 추상화의 보편적 문법에 의거하여 이미지 재현으로부터 독립한 선(線), 면(面), 물감의 질료성같은 요소들 간의 조합을 택했다. 이미지와 상관없는 무색무취의 선을 긋거나 물감을 화면의 뒤에서 앞으로 밀어 드러낸다든가 농담을 이용해 면과 그림자를 만들거나 물감을 화면에 채우고 다시 파내고 또다시 매꾸는 등, 단순한 시각적 요소들을 합성하여 화면 위에 질서를 구축했다. 나는 바로 단색화의 이런 속성 때문에 단색화는 서양 모노크롬처럼 철저하고 혹독하게 회화를 이룬 구성 요소들을 줄이고, 이와 연동하여 작가의 흔적을 지우는 경향과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한다. 미술에 가장 본질적인 ‘최소’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빼야 한다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순혈적 입장과 비교하면, 단색화 작가는 ‘덜 철저한’ 모더니스트였다. 단색화는 뺄셈과 축약으로 위축되 거의 죽은 회화를, 작가의 물리적 노력과 노동을 ‘더 많이 투여하여’, 새로운 조합으로 채워 만들어낸 ‘은은하게 내적으로 살찐’ 추상화였다. 작가들의 이러한 작업 논리와 그 결과로서의 단색화는 평론계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과연 이런 단색화를 모노크롬 칸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덜” 과 “더”를 결합시켜 “채워진 단순화”를 작품으로 이루어낸 단색화의 이런 속성을 콕 짚어서 대변할수 있는 미술비평 언어는 현재까지 없는 것 같다.


반복과 비(非)표현주의적 표현
단색화 작가들은 모두 화면에 손으로 ‘층’을 반복해서 쌓았다. 앞서 해 놓은 것 위에 또 다른 새로운 층을 얹히고, 이를 반복하면서 이 축적된 층들을 하나로 잘 통합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 때마다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이 개입되어 개별 층은 기계적으로 동일하지 않았다. 단색화에 깃들인 통합은, 같은 작업을 계속 하는 반복의 변하지 않는 ‘꾸준함’과 매일 조금씩 다를 수 있는 물리적, 인간적 정황이 빚어내는 ‘뜻밖의 예외’가 서로 합쳐진 결과이다.9 이 똑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반복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감지하기 힘든 미세한 차이가 나는 비슷함’이 하나의 응집된 총체로서 단색화 화면에 드러난다. 이 단색화의 문법은 전통 서양화를 그릴 때 유화 물감의 층을 쌓아 올려 잘 통합된 색층(色層)을 만들어내는 원리와 닮은 점이 있다. 근대 미술의 실망스런 결말이 되버린 회화를 다시 재건설하는 방법으로 회화의 전통적 방법을 구사했다는 점이 단색화의 또 하나의 흥미로운 특징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단색화는 근대 이전의 장인이 오랜 경륜 속에서 만든, 손의 숙련이 빚어낸 공예적 완성도와 아우라가 풍긴다. 시간을 거꾸로 간 듯했다.10 미술비평적인 차원에서 볼 때, 단색화는 이례적인 사건이다. 서양 회화의 진행 방향에만 생각이 고정돼 있는 평론가에게는 별로 흥미진진하지 않은 ‘보수적’인 추상화이다.
하지만 ‘반복’은 새로운 시각에서 볼 때 매우 흥미있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번 만든 층위에 다시 새로운 층을 얹는다는 것은 밑의 층을 (거의) 지우는 과정과 비슷했다. 따라서 층을 쌓는 ‘반복’이란 과정은 전체적으로 손 작업에 담길 수 있는 작가의 개성을 탈취하는 듯한 효과가 있다. 단색화 국내 평론가는 이를 작가의 표현적 자아를 ‘중성화’한다고 하면서, 자기부정, 금욕을 지향하는 동양적 정신관의 발로라고 해석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어느 특정 문화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만들기와 지우기, 파괴와 재건설의 연속적 합(合)은 개별 층에 묻어 나올 수 있는 작가의 튀는 개성이나 결점을 둘 다 희석시키는 중성적 느낌을 초래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단색화 작가들이 애초에 시작했던 표현주의적 스타일에 강하게 묻어났던 감정이나 분출하고 싶은 작가적 자아를 가라앉힌 듯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단색화 화면에는 개별 작가의 방법이 담겨 있지만, ‘나를 보아달라’는 예술적 자아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단순히 순수한 몰아적 태도라기 보다 비(非)표현주의적인 표현같이 느껴진다. 한편 이는 넓게 보아, 당시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 (그리고 그 언저리에서 성행하던 팝아트나 개념미술등)이 주장한 ‘작가의 지나친 감정이나 의도의 추방’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중성적 느낌은 ‘소거’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작가의 물리적 노동을 극대화해서 나온 결과였다.
회화의 역사라는 것이 각 단계마다 (불필요한 것을 다 제거하고) ‘더이상 줄일 수 없는’ 철저한 최소함을 지향해 나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면, 단색화는 분명히 그런 전통의 후예는 아니다. 단색화의 특성을 이해하면 회화의 축약이 직선적으로 전개된다고 기술하는 미술사에 대한 믿음이 금이 간다. 단색화는 인간적 소산으로서의 회화를 거의 증발시키던 1960년대와 70년대 서양의 미적 감수성으로부터 이탈하여, ‘덜’ 축약하며 작가적 노동은 ‘훨씬 더 강도높게’ 투입하여, 자아를 비우는 새로운 길을 보여 주었고, 회화의 존재를 되살렸다. 단색화의 방법은 미술사 책에는 새겨져 있지 않지만, 많은 작가들이 실제 창작에서 귀하게 여기는 지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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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림(Kate Lim)은 미술 저술가이자 아트플랫폼아시아(Art Platform Asia) 대표로 박서보의 영문 평전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2014),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2019)을 출간했다. 그 외 영문 저술로는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2017), “Making
Sense of Comparative Stories of art: China, Korea, Japan”(2018) 등이 있다. 박서보의 작품론 “Park Seo Bo: Crafted Abstraction”이 2024년
출판될 예정이다.
6 오상길과의 인터뷰 (2003),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Vol.1, p.313 (도서출판 ICAS)
7 케이트 림, “박서보 단색화의 출발 – 시대로부터 무장 해제 당했다” (미술의 창, 법률신문, 2023 년 2 월 9 일)
8 Bridget Riley (2002), “Making Visible”, Paul Klee: The Nature of Creation, p.15 (Hayward Gallery Publishing)
9 케이트 림 (2016),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 Fracturing Conceptual Art: The Asian Turn, p.89 (Art Platform Asia)
10 케이트 림, Park Seo Bo & Dansaekhwa, forthcoming publication (Tokyo Gallery + BTAP)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7 케이트 림, “박서보 단색화의 출발 – 시대로부터 무장 해제 당했다” (미술의 창, 법률신문, 2023 년 2 월 9 일)
8 Bridget Riley (2002), “Making Visible”, Paul Klee: The Nature of Creation, p.15 (Hayward Gallery Publishing)
9 케이트 림 (2016), “Language of Dansaekhwa: thinking in material”, Fracturing Conceptual Art: The Asian Turn, p.89 (Art Platform Asia)
10 케이트 림, Park Seo Bo & Dansaekhwa, forthcoming publication (Tokyo Gallery + BTAP)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