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이재욱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봐야 할 때”

입력 : 2020.09.02 17:13

옛 안기부 건물, 북한 주민 등 담은 신작 발표
또렷한 흑백 콘트라스트로 사유적 긴장 유도

제5별관, Transparency in Lightbox, 70x56cm, 2020
제5별관, Transparency in Lightbox, 70x56cm, 2020
 
“지금은 일상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옛 안기부 건물을 마주하고 있자면, 잘못된 역사의 순간들이 이제는 무명의 목격자들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껴요.” 동시대 사회문화적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이 발현되는 일상적인 현장을 포착해온 이재욱(40)은 추상적인 사회 현상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미시적 시점을 통해 구체화된 장면으로 치환해왔다. 
 
중앙정보부 사무동, Transparency in Lightbox, 70x56cm, 2020
중앙정보부 사무동, Transparency in Lightbox, 70x56cm, 2020
 
작가가 이번에는 50여 년 전 남산 도처에 자리했던 중앙정보부 건축물을 소재로 삼았다. 신작 <Grade X Exposure>(2020)은 중앙정보국 본청, 안기부 사무실, 안기부 6국 등을 렌즈에 담은 것으로, 이들 건축물들을 훼손된 권력의 상징으로 설정했다. 시간이 흘러 용도가 변경된 이곳에서 마주한 감상을 사진적 방법으로 극대화해 오묘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그의 흑백 사진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거나 서슬 퍼렇거나 샛노란 색감 등의 컬러 그라데이션이 레이어드 돼 있다. 일몰 풍경을 보다 더 아름답게 촬영하기 위한 선셋 필터(Sunset Filter)를 역으로 설정한 것으로, 현실의 부정, 사건의 폭로 등을 의미하는 작가만의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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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욱은 암실에서 흑백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에서 콘트라스트를 조절하는 다계조 필터를 Grade 5로 조정한다. 이로써 <Grade X Exposure>를 극단적인 시각 조율 상태(grade 10)를 의도한다고 설명했다. 
 
Inner Safety Ⅱ #1, Archival Pigment Print in Artist's Frame, 122x92cm, 2019
Inner Safety Ⅱ #1, Archival Pigment Print in Artist's Frame, 122x92cm, 2019
 
북한 주민들이 그들의 스마트폰으로 일상생활을 찍은 사진을 활용해 지난해 완성한 연작 <Inner Safety Ⅱ>은 북한 방문객이 촬영한 사진과 북한이 자체적으로 배포하는 이미지의 순수성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주민들이 별 의도 없이 직접 촬영한 사진은 아직 검열되지 않은 날것들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지금껏 북한을 방문했다며 관광객들이 촬영한 사진들,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배포하는 이미지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의혹이 들곤 했어요. 사진이 허락된 대상만을 허용된 장소에서만 촬영한다면 이는 통제와 검열로부터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지, 왜곡된 이미지와 다른 게 없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는 북한 주민들이 직접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이미지, 다시 말해 자연스럽고 날 것에 가까운 이미지를 수집했다. 이는 단순히 미지의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대상화되는 우리 사회 일부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로까지의 확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재욱은 2018년 열린 ‘너의 잘못이 아니야’展에서 발표한 <Inner Safety l>(2016)에서 국가의 위기와 갈등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역설적이게도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등 일련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Inner Safety Ⅱ #2, Archival Pigment Print in Artist's Frame, 122x92cm, 2019
Inner Safety Ⅱ #2, Archival Pigment Print in Artist's Frame, 122x92cm, 2019
 
<Grade X Exposure>와 <Inner Safety Ⅱ> 연작이 공개되는 이재욱 개인전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 2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옥인동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모든 현상을 초월하게 되는 지점으로, 내부에서 발생한 일이 외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때의 시공간 영역의 경계면을 의미한다. 사회문화적 규범의 단면을 수집하고 사진으로 통해 이러한 행위와 해석의 한계를 확장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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