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7.02 17:01
50년 매진해온 평면적 존재가치 탐구
평면조건 기틀 마련한 1970년대 ‘등식’ 시리즈 포함,
장식 배제한 담박한 화면(畫面)의 신작 공개…
개인전 ‘Conditional Planes’, 28일까지 더페이지갤러리

이렇다 할 조형적 특성 없이 절제된 표현과 담박한 화면(畫面)으로 다가오는 그림이 있다. “그래서 벽지 같다는 말 많이 들었죠. 벽지라는 게 있는 듯 없는 듯한 건데, 그만큼 내 그림이 부담 없다는 뜻 아니겠어요? 허허”
최명영(78) 홍대 미대 명예교수는 붓질을 거듭하며 이를 겹겹이 쌓는다.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지만 반복된 붓질을 통해 정신성과 수행성을 담는다.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중성적 색채의 질료를 화면에 굴곡 없이 골고루 펴내어 질료의 평면화를 이룬다. 개성을 제거한 단일 색채와 질감만으로 회화, 즉 평면으로서의 존재방식을 규명하고자 한다. 최명영은 이를 ‘평면조건’이라 명명하고 197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그에 관한 탐구를 지속해왔다. 궁극적으로 2차원 평면의 필요 요건은 무엇이며 그 성립 요건을 통해 회화적 리얼리티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물음인 셈이다.
“단조무미할 수 있겠죠. 작업의 요체가 되는 소지, 매체, 행위는 물론이고 펑퍼짐한 작품구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변조의 드라마나 특기할 제스처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그저 캔버스에 일상적 삶 그 자체, 온갖 기억과 상념마저도 묻어가면서 그 과정의 추이에 따라 새로운 존재의 지평을 열고 싶을 뿐입니다.”


홍익대 회화과 재학 중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궁구하던 최명영은 1962년 동기들과 함께 ‘오리진(Origin)’ 협회를 창설했고, 이어 1969년 화가, 조각가, 비평가 등 당시 한국미술계를 지탱하던 다양한 분야의 구성원들과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하는 등 당대 한국미술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했다. 수십 년째 몰두해온 ‘평면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의 탐색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1970년대 중반에는 색면 위에 지문의 흔적을 반복적으로 남김으로써 평면을 형성해 반복을 통한 물성의 정신화와 내면공간의 확장을 꾀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이른바 롤러 작업을 시작했는데, 캔버스 평면 위에 질료를 롤러로 도포하길 거듭하며 평면의 확장과 같은 새로운 층위를 형성했다. 1980년대 이후 시작된 ‘수직∙수평’ 작업에서는 씨줄과 날줄의 반복적인 직교로 새로운 실존적 지평을 형성하는 데 힘썼다면, 1990년대 이후까지 이어진 작업에서는 ‘몸을 드리는’ 수행적 층위까지 확장했다. 2015년에 이르러 그간 시도해온 ‘평면조건’을 다시 화면으로 불러들여 물질과 정신의 화학적 결합과 동세를 머금은 부동성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회화 평면 위의 비조형성에 주목한다. 비조형성은 회화 속 형상과 이미지의 안티테제(Antithesis, 반정립)로서 이해하기 보다는 평면 위에서 벌어지는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반복적 수행성은 행위의 주체를 배제한 채 무미건조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일상 속 맞닥뜨리는 내외부의 자극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다시 말해 최명영이 평면 위에 일궈내는 모든 행위는 작가의 내면세계와 일상의 리듬과 호흡에 궤를 같이하며, 이는 곧 질료로 대변되는 물질성이 정신적인 차원으로 환원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용대 미술평론가(전 대구시립미술관장)는 이번 전시 서문을 통해 “최명영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선택적으로 활용하면서 기억에 바탕을 둔 연상 작용에 의지하여 물질의 부드러운 촉감이나 차가움, 햇빛이 느껴지는 질료의 디테일, 어떤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는 미묘한 색감들을 본능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되지 않고 있지만 매일같이 접하는 공기나 음식을 요리하는 일상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거에 반응하는 그의 감정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일상과 사물의 특질들이 각각의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가를 이해하면서 그것을 환원하고 그 모두를 동시에 활용한다”라고 설명했다.


최명영 화백이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 <Conditional Planes>을 가진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을 대거 전시해 완숙기를 조명하고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수직수평’ 시리즈를 중점적으로 선보여 60년 화업을 아우른다. 특히 대표작 <Conditional Planes(평면조건)>의 기조를 마련한 1970년대 작품 <Signs of Equality> 시리즈를 함께 구성해 미적 논리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최근 루이비통 파운데이션의 패밀리컬렉션에 소장됐으며, 이외에도 도쿄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28일까지 서울 성동구 서울숲길 더페이지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