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처럼 스쳐가네, 그가 그려온 '아버지'들이

입력 : 2016.12.15 03:04

[공연 리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이순재 연기 60주년 기념작
'개인'보다 '아버지'에 초점 맞춰… 3시간 10분간 탁월한 연기

"어떻게 하면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빛과 가족애로 가득했고 겨울엔 썰매 타느라 두 볼이 붉어지는 줄도 몰랐어요. 언제나 어떤 즐거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뭔가 좋은 일이 앞에 있었어요…."

죽음을 결심한 늙은 외판원 윌리가 환상 속 죽은 형 앞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극본, 박병수 연출)의 한 장면. 윌리 역 배우의 목소리에 인생 전체가 농축된 듯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슬픔과 회한이 어우러져 무대 전체를 채웠다. 그 배우는 올해 만 81세의 이순재다. 연기 인생 60주년을 기념해 지난 13일 개막한 이 연극에서 이순재는 3시간 10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기나긴 대사를 소화하며 인생의 막다른 길에 접어든 가장(家長)을 연기했다.

배우 이순재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 ‘세일즈맨의 죽음’의 이순재(왼쪽·윌리 역)와 손숙(린다 역). 1949년 아서 밀러 원작의 이 연극에서 두 사람은 한국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부모를 연기한다. /컴퍼니그리다
배우 이순재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공연 ‘세일즈맨의 죽음’의 이순재(왼쪽·윌리 역)와 손숙(린다 역). 1949년 아서 밀러 원작의 이 연극에서 두 사람은 한국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부모를 연기한다. /컴퍼니그리다

아서 밀러가 1949년에 쓴 이 작품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허망한 꿈을 좇다 무너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순재가 주연한 연극은 '개인'보다 한 가족의 '아버지'에 초점을 맞췄다. 성공과 행복을 위해 직장 전선(前線)에서 한평생을 바쳤고, 권위와 허세가 몸에 뱄지만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서툰 아버지, '개천 용(龍)'의 성공 신화가 저물어 가는 21세기 초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 말이다.

연극 속에서 이순재가 연기하는 '아버지'에는 그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숱한 아버지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가족의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표정에선 드라마 '보통 사람들'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을 호되게 질책하는 목소리에선 '사랑이 뭐길래'의 엄한 아버지가 스쳐갔으며, 외도 현장을 큰아들에게 들켜 멋쩍어하는 안색에선 '거침없이 하이킥'의 희극적인 아버지가 보였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자식 세대와도 단절됐음을 깨달은 뒤 "밤낮 국도를 달리고 기차를 타고 약속을 하며 수십 년을 일해 왔는데도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게 됐다"는 대사를 허탈하게 내뱉는 장면은 그 모든 드라마의 비극적 결말인 듯 아프게 다가왔다.

연극은 인물 사이의 갈등을 원작보다 훨씬 격렬하게 표현해 극적 효과를 높였다. 본사에서 근무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던 주인공이 해고당하는 장면과 큰아들과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이순재는 번번이 힘에서 밀려나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데, 그때마다 객석에선 비명이 들렸다. 늘 상냥하게 남편을 대하다가 위엄 있는 슬픔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아내 린다 역 손숙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22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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