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노동의 흔적… 머리 아닌 오직 몸으로 그려내다

입력 : 2016.10.04 03:00

- 단색화의 새 주자, 화가 이진우
숯·한지 붙여 쇠솔로 두드린 작품… 프랑스 건너가 30여년 작업해와
해외언론서 먼저 실력파로 주목… 박서보 화백이 발견한 작가이기도
19일 조선일보미술관 개인전 개막

프랑스 파리 외곽 뱅센에 있는 100년 된 아파트형 공장. 거미줄처럼 어지러운 그라피티(낙서화)를 지나 5층에 있는 화가 이진우(57)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진한 먹 향이 밀려왔다. 구석엔 한지 뭉치와 검은 숯이 가득하다. 창밖으로는 고색창연한 유럽식 건물이 펼쳐지는데 작업실 안 공기는 영락없는 한국이다.

"매일 기도하듯 붓글씨 쓰고 된장찌개 먹습니다. 햄버거 먹고 서양 노래 들으면 머리가 서양식으로 돌아가고 서양 그림을 그리게 되지요. 몸은 이역만리에 있지만 뼛속 깊이 밴 한국을 그리고 싶습니다." 한국 그림 그리려 몸도 마음도 한국식으로 단련한다는 작가다.

파리 뱅센 지역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진우 작가가 작업대에 기댔다. 그의 앞으로 펼쳐진 건 자갈밭이 아니다. 숯 위에 한지 수십 장을 덧붙이고 쇠솔로 두드려 만든 그림이다. 몸의 고된 흔적이 묻어 있다. /김미리 기자
파리 뱅센 지역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진우 작가가 작업대에 기댔다. 그의 앞으로 펼쳐진 건 자갈밭이 아니다. 숯 위에 한지 수십 장을 덧붙이고 쇠솔로 두드려 만든 그림이다. 몸의 고된 흔적이 묻어 있다. /김미리 기자
1983년 프랑스에 건너가 30여년간 이곳에서 작업해온 이진우는 국내에선 생소한 작가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르 피가로' 등 해외 언론이 단색화를 다루면서 1세대 단색 화가를 이을 실력파 차세대 작가로 그를 주목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2월까지 파리 세르누치 미술관에서 열린 '파리-서울-파리: 프랑스의 한국 작가들'전에선 김환기, 이우환 같은 유명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가 허름한 작업실에서 홀로 싸운 결실을 곧 고국 관객에게 풀어놓는다.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사업 중 하나로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여는 개인전 '비움과 채움'에서다.

이진우의 작업은 고된 노동의 흔적이다. "저는 머리 없는 작가입니다. 머리는 집에 떼놓고 몸만 가지고 작업실에 갑니다." 학교 칠판만 한 커다란 캔버스 위에 까만 숯을 다닥다닥 붙인 다음 한지를 덧붙이고 쇠로 된 솔로 두드려 숯의 형상을 없애간다. 이 과정을 열 차례 넘게 반복한다. 몸이 녹초가 되는 사이 자갈밭처럼 우둘투둘 거친 질감이 그림의 표면에 살아난다.

"80년대 프랑스에 왔을 때 다들 전위 예술 한다고 난리였죠. 저도 거기 휩쓸렸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피가 도는 몸이 있고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한, 몸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걸요. 세월이 흘러도 몸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은 영원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제 No.16c-022'. 숯 조각들이 한지 수십 겹에 덮여 제 모습을 감췄다. 우주 공간을 떠도는 운석 조각 같기도, 조개더미 같기도 하다. /이진우
'무제 No.16c-022'. 숯 조각들이 한지 수십 겹에 덮여 제 모습을 감췄다. 우주 공간을 떠도는 운석 조각 같기도, 조개더미 같기도 하다. /이진우
신념은 옳았다. 무명 작가로 살던 그가 하루아침에 기적적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 2년 전 단색화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박서보 화백이 파리의 유력 화랑인 페로탱 갤러리에 개인전을 열러 왔을 때였다. 박 화백은 갤러리가 있는 마레 지역의 한 호텔에 짐을 풀었는데 호텔 로비에 걸린 그림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단다. "아무리 봐도 이건 한국 사람이 그린 작품이야. 한국의 '몸성'이 느껴져." 호텔 직원을 통해 수소문해 작가를 찾았다. 그가 이진우였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성함은 알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저를 찾아 전화까지 주시다니요. 30년 고생을 이렇게 보상받나, 꿈만 같았지요." 박 화백의 주선으로 조만간 일본 '도쿄 화랑'에서도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다. 손은 꺼멓고 쇠솔로 하도 문질러 지문은 거의 없어졌다. 스마트폰 지문 인식도 안 된단다. 끝없는 수행과도 같은 작업을 국내 관객들에게 내놓는 소감을 묻자 "어머니가 오래도록 끓인 된장찌개처럼 편안하게 느꼈으면 한다"며 웃었다. (02)724-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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