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섬뜩함과 서정미의 공존, 상반미학 연극 '렛미인'

입력 : 2016.01.26 09:47
투명하고 하얀 '일라이'의 얼굴이 뜨겁고 빨간 피로 범벅이 됐다. 섬뜩하면서도 절절한 서정성이 묻어난다. 일라이는 뱀파이어여서 피가 필요하다.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일라이에게 사람의 피를 공급하며 순애보를 펼친 인간 '하칸'은 늙었다.

연극 '렛 미 인'은 섬뜩함과 서정성이 내내 공존하며 긴장과 이완을 수시로 오가는 '상반의 미학'이 돋보인다. 북유럽의 날 서고 시린 감성을 오롯이 녹여 넣었다.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과 스웨덴 영화감독 토머스 알프레드슨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렛미인'(2008)이 바탕이다. 2010년 할리우드 버전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와 결손 가정의 외로운 소년 '오스카'의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그렸다. 대립 또는 대조 또는 대칭의 순간에서 풍겨져나오는 깨질듯한 감성의 순간을 포착한다.

일라이는 몇백년을 산 죽지 않는 뱀파이어다. 오스카는 만개를 앞두고 있는 순수한 인간 소년이다. 일라이는 나이를 먹지 않고, 오스카는 서서히 나이를 먹을 것이다. 이들 사이의 아이러니함은 둘 간의 호감과 사랑을 안타깝게 만든다.

가장 대중에 잘 알려진 스웨덴 영화에 비해 삼각 관계가 도드라진다. 영화에서는 하칸이 아빠처럼 그려진다. 소설에서는 소아성애자처럼 보인다. 연극에서 하칸은 일라이를 더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인다. 하칸이 젊었을 때 사랑한다는 말에 반응했던 일라이는 같은 말에도 더 이상 동하지 않는다. 일라이가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할 때, 북유럽의 찬 기운이 가슴을 파고든다. 일라이, 오스카, 하칸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상반된 미학의 정점이다.

무대를 빼곡히 채운 나무들의 수직성과 눈을 휘날리는 인물들 동선의 수평선 역시 긴장을 고조시키는 대조의 장치다. 수직성의 날줄은 나무와 정글짐을 끊임없이 자유자재로 오르는 일라이의 영원한 생명, 수평성의 씨줄은 나쁜 소년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며 한정된 공간에서 좌우로 움츠러드는 오스카를 상징하는 듯하다. '렛미인'은 이처럼 이야기뿐 아니라 무대 전체에서 극의 분위기를 뿜어낸다. 지난해에만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베테랑' '사도' 검은사제들' 등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대세 여우로 떠오른 박소담은 프로 연극 데뷔작인 '렛미인'에서도 이름값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절규할 때 소녀와 뱀파이어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의 감정도 함께 토해낸다. 활동량이 좋은 뱀파이어를 연기하기 위해 '무브먼트' 요소도 많은데 나무와 정글짐을 척척 오르는 등 능숙하게 소화한다. 베테랑 배우 주진모는 세월의 흔적이 녹아나는 음성과 어쩔 수 없이 느릿한 동작에서부터 하칸이다.

한국에 세 번의 내한공연을 펼친 아이슬란드의 싱어송라이터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도 극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요소다. 네오 클래시컬, 미니멀리즘 등으로 설명되는 아르날즈의 음악은 북반구의 바로 깨질 듯한 얼음장 같은 서정성을 표현하기에 제 격이기 때문이다. '렛미인'에는 침묵에 가까운 대화의 순간도 많은데, 그 빈틈을 아르날즈의 음악이 서서히 파고들 때 이후 폭발하는 절절한 서정성의 감성은 극대화된다.

역시 동명영화가 바탕인 뮤지컬 '원스'로 토니상·올리비에상을 받은 존 티파니가 연출했다. '렛미인'은 누가봐도 티파니의 작품이다. 재기발랄하지만, 튀지 않는 미니멀함이 돋보인다. 담백하고 깔끔하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스펙터클의 힘을 보여준 장면인 수영장 신은 정글짐 뒤편에 감춰뒀던 수조에 돌연 물을 채워 연출하고, 마지막 기차 신은 천장에서 순식간에 내려온 바(bar)와 조명 만으로 마술을 만들어낸다.

일라이와 오스카 사이의 중요한 교감 신호인 모스 부호 역시 원작의 세밀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음성 증폭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원스'와 2012년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폐막작인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08-블랙 워치'에서 선보인, 안무를 연상케 하는 무브먼트 역시 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라이는 '렛미인'(들여보내줘)라고 초대를 받아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자신에게 토라진 오스카가 그 말을 하지 않자 몸을 꿈틀대는데, 그 순간 겉보기에는 아무런 장치 없이 온몸이 피범벅이 된다. 이처럼 기술까지도 오롯이 이야기를 전달한다. 공연제작사 신시컴퍼니는 한국 라이선스 연극에서는 드물게 레플리카 프로덕션을 표방한다. 원작 프로덕션의 모든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는 공연 형태로 균일한 완성도를 느낄 수 있다.

2월28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일라이 박소담·이은지, 오스카 안승균·오승훈, 하칸 주진모. 프로듀서 박명성, 극본 잭손, 연출 존 티파니, 국내 협력연출 이지영, 무브먼트 디렉터 스티븐 호겟, 음악 올라퍼 아르날즈, 무대 디자이너 크리스틴 존스, 조명 디자이너 샤인 야브로얀, 음향 디자이너 가레스 프라이. 3만3000~7만7000원. 신시컴퍼니. 02-577-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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