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ABT 수석무용수 서희 "완벽하지 않아도 제 몸을 사랑해요"

입력 : 2015.08.03 09:38
한국인 첫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수석 무용수(프린서펄 댄서)인 발레리나 서희(29)의 생기 넘치는 몸짓에 대관령이 꿈틀댔다.

그녀는 '제12회 대관령 국제 음악제'에서 클래식 음악의 옷을 입고 무용의 다채로운 결을 보여줬다.

지난달 30일 강원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김다솔이 연주한 서정적인 라흐마니노프의 '엘레지 E플렛 단조, op.3, no.1' 선율에 맞춰 알렉산드르 암무디와 함께 선보인 '비가 올 확률'(안무 리암 스칼릿)은 애절했다.

같은 무대에서 폴황·권혁주(바이올린), 헝-웨이 황·석지영(비올라), 정명화·박상민(첼로)으로 구성된 현악 6중주와 함께 무대에 올라 암무디와 함께 공연한 '잔인한 세상'(안무 제임스 쿠델카)는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세계적인 안무가 그레고리 돌바시안의 연출로 새로 창작돼 1일 오후 알펜시아 리조트 콘서트홀에서 세계 초연한 라벨의 '볼레로'는 화룡점정이었다. 암무디와 함께 이 무대에서 서희는 우아함의 결정체를 흩뿌렸다.

'볼레로' 공연에 앞서 무대 해설한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은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돌바시안에게도 이미 너무 유명한 라벨의 '볼레로'를 새롭게 안무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을 것"이라면서 "이번 '볼레로'는 기존의 고전적인 느낌과 달리,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매력을 가졌다"고 전했다.

송영훈, 고봉인, 김민지, 김민혜 클라라 등 4명의 첼리스트와 서울시향 팀파니 수석인 아드리앙 페뤼숑(타악기)이 연주한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동작들을 선보인 서희는 현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동작에도 고전미를 숨겨놓은 묘를 발휘했다.

이처럼 서희의 무용을 덧댄 클래식 음악은 입체적이었다. 8월 첫날 눈 부신 태양처럼 밝게 웃는 서희를 볼레로 공연이 끝난 직후 알펜시아 컨벤션센터에서 만났다. 이번이 대관령 첫 방문이라는 그녀 몸짓의 우아함과 당참은 말과 생각에도 오롯이 옮겨졌다.

-이번에 '대관령 국제 음악제'에 어떻게 참가하게 됐나요? 이번에 함께 무대에 프랑스 출신의 발레리노 알렉산드르 암무디도 직접 섭외한 것으로 아는데요.

"구삼열 대표님이랑 정명화 선생님(대관령 국제 음악제 공동 예술감독)이 3년 전 뉴욕으로 제 발레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시간이 나면 대관령 한번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여름마다 항상 유럽에서 공연해서 죄송해하고 있었죠. 1년 전에 다시 연락을 주셔서 올해 꼭 오라고 하셔서 이번에는 미리 다른 공연을 다 뺐어요. 존경하는 분의 말씀이니 오게 된 거죠. 알렌산드르는 제가 ABT에 (정식단원으로) 들어간 지 9년이 됐는데 더 오래됐어요. 여러 작품 같이 호흡을 맞췄는데 이번에 함께 한 안무가의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함께 했어요. 저랑 알렉산드르랑 같이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함께 하게 됐죠."

-어렸을 때부터 주로 해외에 있었어요. '대관령 국제 음악제' 이번 배경이 프랑스이기도 한데 다양한 문화권에 살면서 많은 걸 느꼈을 것 같아요. 정체성의 혼돈 같은 건 없었나요.(서울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늦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서희는 선화예술중학교 1학년 때 워싱턴 D.C.의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2003년 세계 권위를 자랑하는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독일 존 크랑코 발레학교를 거쳤다. 2004년 ABT 산하 단체인 스튜디오 컴퍼니 단원, 2005년 ABT 수습 단원을 거쳐 2006년 군무 무용수로서 이 발레단에 정식 입단했다. 2010년 주역 무용수를 거쳐 2012년 마침내 수석 무용수에 올랐다.)

"이제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살았죠.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는 것을 고려하면 외국에서 두 배 더 산셈이죠. 그런데도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집이 되게 보수적이었거든요. 밤늦게 들어오면 안 된다, 그런 거요(웃음). 그런데 어디를 가든 이 문화를 흡수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다른 것이 있다는 알고, 사람들이 다르다는 걸 역시 알죠. 사람과 문화가 다양하고 다르다는 걸 알아요.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 사람, 유럽 사람 미국 사람 모두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고른 레퍼토리로 추구하고자 한 것이 있나요? "대표님이 주제가 프랑스라고 하셔서 프랑스 쪽에 기반을 둔 발레를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리스트를 이 만큼 뽑아서 보내드렸는데 이번에 '볼레로'를 꼭 했으면 하셨죠."

-특별히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세 작품 모두 제게 특별해요. '비가 올 확률'은 저에게 맞춰 지난해 가을 시즌에 공연한 작품이고, '잔인한 세상'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무용수인 줄리 켄트(지난달 은퇴한 ABT 전 수석무용수)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거든요.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죠. '볼레로' 역시 저에게 맞춰진 춤이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고요. 그런데 안 좋아하면 춤을 추 수가 없어요(웃음)."

-'볼레로'는 같은 멜로디가 수없이 반복되고 그것이 극적인 구성을 만들어내는 곡이에요. 건축적인 부분이 있는데 무용 역시 건축적이라죠. 예술 장르 중 무용은 무용수의 몸의 노동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라서 무용수의 작품이 끝나면 마치 건축물이 하나 지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요. '볼레로'의 안무가인 돌바시안은 힙합 기반인데 그런 점이 안무에 어떻게 적용이 됐나요?

"연습 때는 녹음된 것으로 하니까 15분에 딱 맞춰서 끝냈죠. 근데 리허설 때 라이브 음악과 맞춰서 하니 16분30초인 거예요. 1분 동안에 추가로 할 게 없었어요(웃음). 연주자, 무용수가 칼같이 맞춰야 하는 거죠. 그런데 멜로디가 계속 반복될까 변화를 어떻게 감지해야 하느냐고 연주자분에게 물어봤어요. 첼로 4대 솔로가 한 번씩 돌아가는데 저희는 똑같이 들리거든요. 잠깐 연주를 멈춰서 타이밍을 알게 힌트를 줄까 하셨는데 '볼레로'라는 음악은 자신도 모르게 (전개가) 커져서 '어 커졌네'라고 생각해야 하는 음악이라 하더라고요. 그런 타이밍을 주면 음악(의 본질)을 버려야 해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본공연에서 15분 안에 딱 마치니 기분이 참 좋았어요. 클래식 발레는 (건축물처럼) 짜임새가 있어요. '볼레로'는 힙합에 베이스를 둔 모던 무용이기는 하지만 클래식 음악에 맞춰 흘러가게끔 했죠. 음악을 두고 그 음악에 맞춰 간 것이라 건축적인 면이 있죠."

-무용수가 느끼기는 레코딩 음악과 라이브 음악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서희 씨는 어떤 것을 더 선호하시나요?

"솔직히 레코딩에 춤을 춘 적은 거의 없어요. 춤을 추기에 좋은 환경에서 생활해왔죠. ABT에는 지휘자 세 분이 계시는데 그 중 저를 주로 맡아주시는 분이 있어요. 예술은 거의 호흡이에요. 음악과 춤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가 최상이죠. 발레는 특히 순간의 예술이거든요. 레코드로 추면 재미가 없어요. 라이브 음악과 맞춰서 할 때 느끼는 것이 있죠. 사람이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잖아요. 그날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다른데 라이브 음악으로 하면 그게 가능하죠. 관객들이 보시기에 미묘한 차이가 그날 공연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도 라이브음악으로 해서 좋았어요. 리허설 기간이 많지 않아서 (호흡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내 귀가 호강했어요. 음악이 아름답다는 당연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죠."

-발레 콩쿠르를 한국에 유치해 내년께 서울에서 연다는 계획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요.

"한국 학생들을 위한 재단을 하나 만들려고 해요. 발레를 하는 친구들을 위한 재단이죠. 굶어 죽는 애들도 많은데 발레, 왜 예술에 돈을 들이냐는 시선도 있는데요. 저는 제가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것은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죠. 발레를 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환경에서 배우고 자라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요. 콩쿠르는 1, 2, 3등 순위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크게 배워서 넓은 곳에서 무용수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제가 능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선 작게 할 거예요. 현재 제 커리어가 피크는 아닌데 그것에 가까웠다고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현역에 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하고 싶어요. 제 인생 중에 10년이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 때인데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싶은 거죠. 제가 제일 잘 하고 알고 있을 때 도와주고 싶어요."

-약 10년째 몸담은 ABT 생활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발레단은 저에게 집이자 울타리에요. 제가 발레리나 서희로 불릴 때는 아메리칸 발레 시터어 프린시펄이라는 호칭이 따르죠. 제게 얼마나 힘을 주고 울타리를 만들어주는지 몰라요. 요즘 한 발레단에 오래 정착하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제게는 그게 맞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아요. 한 곳에서 배우고, 뿌리를 내리고 모범이 될 수 있는 무용수로 지낸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자부심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발레단 일이 가장 1순위죠. 어디 나가서 ABT라고 말하는 순간 어깨에 빵빵 힘이 들어가요(웃음). 발레단도 우리 발레단에 희가 있어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죠. 엄마랑 가족들이 종종 뉴욕에 오면, 어디에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면 정작 저는 아는 게 없어요. 가족들은 '핫'한 곳을 다 알고 있고(웃음). 그렇게 보면 정말 발레를 열심히 한 것 같기도 해요(웃음)."

-서희 씨를 롤모델로 삼는 후배들도 많은데요.

"제 성격이 그렇지만 학교 다닐 때 제 일이 안 끝나면 다른 일을 못 했어요. 발레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죠. 외국에 나가서 배운다는 것이 발레도 배우지만 그 문화도 배우는 거잖아요. 저는 근데 그것을 못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 다시 살라고 해도 비슷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여유가 있으면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해요."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이에요. 여자로서, 무용수로서 나이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스물다섯 살 때 그게 왔어요(웃음). 스물다섯 살이 되는 생일에 되게 슬픈 거예요. 근데 그날 엄마가 보내주긴 편지가 있어요. 스무 살이 가장 아름다운 때라 생각할 수 있는데 서른 살이 더 좋고 마흔 살이 더 좋고 오십이 더 좋더라고 적혀 있었죠. 지나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할 수 있을 때까지 아름답게 잘하고 싶지만요."

-이탈리아 출신의 스타 무용수인 로베르토 볼레를 비롯해 ABT 남자 무용수들에게 파트너로서 인기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일 년에 한 번씩 계약서를 써요. 그럴 때마다 다들 좀 더 좋은 조건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최근 계약서를 썼는데 남자 무용수들이 남자 주역 무용수들이 너랑 파트너 하고 싶어 한다고 발레단에 말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면 조건이 좋아진다는 거죠. 발레학교에서 파트너가 호흡을 맞출 때 잘못되면 주로 남자 무용수 탓을 해요. 근데 저는 둘 다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엇인가 잘못됐을 때 저도 잘못이 있는 것을 알죠. 그리고 제가 (남자 무용수가 들기에 몸이) 무겁지 않고요(웃음). 그리고 제가 발레를 할 때 행복해하는 것을 파트너들이 느껴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몸의 비율이 좋고 참 예뻐요.(서희는 키가 168㎝다.) 그래서 몸짓이 더 아름답고 우아해 보이죠.

"저는 제 몸을 사랑해요.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웃음). 제 몸은 다 만들어놓은 것이라서요. 발목을 움직이는 근육부터 다요. 사람은 완벽할 수 없잖아요. 자신은 남들이 모르는 자기 몸을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죠. 하지만 스스로 가꾼 몸이고 아껴서 만들어놓은 것이라 완벽하지는 않아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죠. 무용수가 자신의 몸을 좋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열심히 관리하는 것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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