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ART] "단색화 값 치솟는데… 작가들에겐 남 얘기"

입력 : 2015.05.05 03:00   |   수정 : 2015.05.07 10:00

['단색화' 열풍의 이면]

홍콩·베네치아까지 단색화 붐… 값 10배 뛰는 등 시장 급성장
생존작가는 80대, 대부분 作故… 70년대作 소장 작가 거의 없어
수익은 갤러리·투자자에 몰려

#."그림 안 팔리니 무직자나 다름없었지요. (윤)형근이한테 아침마다 전화해서 '구공탄 갈았어? 설거지했어?' 농담으로 하루 시작했지. 하도 안 팔리니까 그 친구는 장인(김환기) 유작 팔아 생계 유지하다시피 했고. 이런 날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박서보(84) 화백이 지기(知己) 윤형근(1928 ~2007) 화백의 특별전(PKM갤러리·15일까지) 소식을 듣고 상념에 잠겼다. 생전 변변한 개인전 몇 차례 못한 친구가 죽고서야 조명받는 게 못내 아쉽다 했다. 젊은 작가 위주였던 PKM은 이례적으로 작고한 윤 화백의 유족과 '사후 전속' 계약을 하고, 이전·개관 기념 특별전으로 윤형근을 내세웠다.

#."내가 낳았지만 내 손을 떠난 자식(그림)들입니다. 옛날에 나간 그림으로 화상(畵商)들이 하는 일인 거지요." 수화기 너머 정상화(83) 화백은 담담했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는 중이었다. 9일 개막하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국제갤러리와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이 여는 '단색화 특별전'(7일~8월 15일)도 그에겐 물 건너 얘기 같았다. 투병 중인 그는 베네치아에 못 간다. "그저 세상이 나를 조금 알아줬다는 게 흐뭇하고, '팔십 평생 헛살진 않았다'고 나 자신을 어루만져 줄 뿐이지요. 허허."

정상화의 1973년 작. ‘Untitled 73-A-14’. 캔버스에 고령토를 발랐다 뗀 뒤 물감으로 메웠다. 아래는 윤형근의 1978년 작 ‘엄버 블루’. 추사(秋史)의 서체에서 영감받은 작품. /갤러리현대·PKM갤러리 제공
정상화의 1973년 작. ‘Untitled 73-A-14’. 캔버스에 고령토를 발랐다 뗀 뒤 물감으로 메웠다. 아래는 윤형근의 1978년 작 ‘엄버 블루’. 추사(秋史)의 서체에서 영감받은 작품. /갤러리현대·PKM갤러리 제공

지난해부터 시작된 단색화의 열기가 베네치아 비엔날레까지 갔다. 1년 새 시장에서 단색화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중. 미술계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단색화 그림 값은 평균 5~10배 뛰었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 소장이 정상화·박서보·윤형근·하종현·정창섭 등 주요 단색화가 국내 오프라인 경매를 분석한 통계를 보면 시장의 급성장은 더 또렷해진다. 2001~2013년 총 거래액이 59억2700만원이었는데, 지난해 한 해에만 49억1300만원 규모가 거래됐다. 올 1분기까지만 36억7700만원어치가 거래될 정도로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다. 5월 말 홍콩에서는 크리스티와 K옥션, 서울옥션 등 국내외 경매회사들이 단색화를 두고 총력을 쏟는다.

묻혀 있던 우리 그림 '단색화'가 재조명을 받는 것에 미술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정작 수익은 일부 갤러리와 옥션,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뿐, 작가들에겐 비싼 그림 값이 남 얘기나 다름없다. 우선 윤형근, 정창섭, 권영우 등 단색화 작가 대부분이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생존 작가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80), 이우환(79), 김기린(79) 정도다. 현재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70년대 작품에 집중돼 있다. 이미 작가들의 손을 떠나 소장가나 갤러리의 손에 들어간 작품이 대부분.

박서보 화백은 "지금이라도 인정받아 다행 같지만, 한편으론 '나는 뭐야'란 생각도 든다"고 솔직한 맘을 털어놨다. 서울옥션에 따르면 박 화백의 대표작인 70년대 '묘법' 시리즈는 1년 전 100호 기준 1억원 안팎에서 최근 5억~6억원까지 올랐다.

단색화 붐이 장샤오강, 쩡판즈, 웨민쥔 등 몇 해 전 열풍을 일으켰다가 최근 '차이니즈 아트 버블'로 불리며 한풀 꺾인 중국 현대미술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한 미술계 인사는 "단색화에 빠진 서양 컬렉터에게 단색화 매력이 뭐냐고 물었더니 '싸우지 않는 그림'이라더라"고 했다. 그는 "서양 컬렉터는 대개 그림을 벽면에 따닥따닥 거는데, 단색화는 벽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해 다른 그림과 충돌하지 않고 동양의 여백미가 느껴져 좋아한다. 투자 목적이 아니라 단색화 자체를 즐기는 유럽과 미국 컬렉터가 많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라고 했다. 박 화백은 "단색화는 색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며 "수행하듯 목적 없이 반복하는 단색화의 정신에 서구인들이 주목하는 것이기에 붐이 금방 사그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한국 사람들은 '눈이 아니라 귀로 그림을 산다'는 얘기가 있다. 붐 있을 때 반짝했다가 자취를 감추는 '떴다방'식으로 단색화에 접근해선 안 된다"며 "학술적인 연구를 튼튼히 해서 작가들을 미술사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색화


1970년대 서구 미니멀 아트, 일본 모노하(物派) 등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한국의 추상회화 사조. 색을 덧바르거나 물감을 칠한 뒤 뜯어내는 과정을 반복해 만든 그림. 수행하는 듯한 과정이 특징.

♣ 바로잡습니다
▲5일자 A16면 '단색화 값 치솟는데…' 기사 중 작고 작가로 쓴 김기린 화백은 생존 작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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