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영국 발레 주역으로 떠오른 한국인 男女무용수 김기민·최유희
[발레리나 최유희 · 로열 발레단 유일한 韓 퍼스트 솔로이스트]
2002년, 로잔콩쿠르 그랑프리
"난 무대에 설 때 찬란히 빛나… 몸이 연습만 하길 원하네요"
다음달 코믹 발레로 무대 올라
발레리나 최유희(30)는 영국 로열발레단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열네 살 때 파리오페라 발레학교에서 춤을 배웠고, 열일곱 살이던 2002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그해 세계 최정상 로열발레단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2008년 이례적으로 두 등급이나 상승, 수석 무용수 바로 아래인 퍼스트 솔로이스트(First Soloist)가 됐다. '라 바야데르'의 감자티,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 등 굵직한 주역을 꿰차며 차근차근 이력을 쌓았다.

그녀가 오는 5월 2일 코믹 발레 '말괄량이 딸'에서 주인공 리제로 무대에 오른다. 지난 11일(현지 시각)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만난 그녀는 튀튀(여성 발레 의상)처럼 하얀 치마에 까만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야리야리한 아름다움과 단단한 내면이 조화롭게 돋보이는 외모였다. "정말 바빴어요. 사흘 밤 내내 무대에 올랐거든요."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그녀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출신이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옮긴 건 12년 전이다. "내겐 말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한 번도 호적이 없었다. 일본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 이름을 썼고, 북한 국적으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고 했다.
로열발레단은 '빡빡한 스케줄'로 정평이 나 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달력에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내 삶은 무색무취, 무대에 설 때만 찬란히 빛난다"고 했다. 일과는 연습 또 연습으로 채운다. 휴식은 오로지 잠. "몸이 그것만 원한다"고 했다. "잘 자고 잘 먹고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어제만 해도 오전 9시 30분에 연습실에 나와서 밤 11시에 집에 갔죠. 점심시간에 짬 내어 오페라하우스 옥상에 올라가 런던 시내를 봐요. 춤만 추는 생활이 지겹지 않으냐고요? 아뇨. 에너지를 딴 데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춤을 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들어와 공연하길 원해요. 그런 곳에서 숨 쉬고 점프하는데 지겨워하면 안 돼요."
영국 발레는 정교하고 깔끔하다. 특히 상체 움직임을 중요하게 여긴다. 최유희 역시 목과 팔 등 상체가 유난히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동양인 특유의 가녀린 선을 바탕으로 야리야리한 팔을 움직여 섬세한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올해 나이 서른인 그녀는 "나이 드는 게 좋다"고 했다. "발레는 같은 배역이라도 공연할 때마다 달라요. 시간이 제 연기를 성장시켜줄 거라 믿습니다."
[발레리노 김기민 · 동양인 최초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
2011년 입단, 3년만에 수석으로… 마린스키 역사상 유례없는 일
"전설의 무용수들 지나간 곳서 꿈의 무대 밟게 돼 기쁘네요"
"깜짝 소식에 기쁨은 잠시였어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간절히 바랐지만,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자리였으니까요."
'러시아의 자존심'도 그를 막진 못했다. 세계 정상급 발레단인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발레리노 김기민(23)이 이 발레단 최고 등급인 수석 무용수(프린시펄)가 됐다. 270년 역사의 마린스키 발레단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백조의 호수'(1895) '호두까기 인형'(1892) 등을 초연한 클래식 발레의 종갓집이다.

14일 오후 김기민은 '해적' 2인무 갈라 무대에 오르기 위해 미국 뉴욕에 있었다. 국제전화에서 그는 "어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승급 통보 문자를 확인했다"고 했다. "어느 날 하루 공연을 잘한다고 수석 무용수가 되는 게 아니에요. 특히 마린스키는 얼마나 많은 작품을 소화하는지, 얼마나 빼어나게 전막 발레를 소화하는지를 꼼꼼히 따져요. 무대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적 스타 디아나 비시네바를 비롯해 단원만 300명에 이른다. 동양인 발레리노는 김기민이 최초다. 입단 1년 만인 지난 2012년 11월 정단원 승격과 동시에 솔리스트가 됐다. 전통을 중시하는 마린스키에서 한국에서만 배운 토종 무용수가 수석 무용수가 된 건 '사건'이다. 수석 무용수는 김기민을 포함, 13명뿐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김기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을 다니며 김선희 교수에게 기본기를 배웠다. 2009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금상 없는 은상, 2010 바르나 콩쿠르 금상을 차지해 한국 발레계의 왕자로 주목받았다. 러시아 언론은 그를 두고 '1970~1980년대 가장 부흥했던 시대의 러시아 춤을 흡사하게 춘다'고 평한다. "마린스키 무대에만 서면 겸손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바리시니코프 같은 예전 전설의 무용수들 이름이 툭툭 튀어나와요. 전설이 이 무대를 밟고 간 거잖아요."
181㎝에 65㎏인 그는 오는 6월 1일과 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가 공연하는 발레 '라 바야데르' 무대에도 오른다. 객원 수석 무용수로 데뷔해 주역인 전사 '솔로르' 역할을 할 예정이다. "ABT는 부호네스, 마카로바, 우리나라의 서희 누나, 폴리나 세미오노바 등 스타들이 쟁쟁한 곳이에요. 꿈의 무대를 밟게 돼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