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처럼 담백하고, 자연처럼 순수하다

입력 : 2014.12.11 01:14

[가야금 명인 황병기, 창작 산조 음반 내]

정남희 선생 산조 바탕삼아 70분짜리 대형 작품 만들어
사랑채에서 벗과 즐기는 듯… 아담한 공간 골라 녹음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같은 기름기 뺀 가야금 소리. 황병기(78) 가야금 명인이 이번 주 낸 가야금 산조 음반은 담백하다. 대나무밭에 바람이 스치듯 꾸밈없이 순수한 음악만 흘러나온다. 신(神)을 향한 서양 음악의 최고봉이 바흐라면, 황병기 명인의 가야금 산조는 자연을 노래하는 전원시 같다.

"바흐는 사람이 작곡한 것 같지 않아요. 대단해. 비발디는 대중이 좋아했지만 몇 번 들으면 느끼해서 못 듣겠는데, 바흐는 달라요. 신(神)의 음악이야."

황병기 가야금 명인은 군소리를 싫어하는 담백한 성품이다. 그런 그가 “요즘 이거 다 연주하라면 못해요.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음악입니다”라고 했다. /사진가 안웅철
황병기 가야금 명인은 군소리를 싫어하는 담백한 성품이다. 그런 그가 “요즘 이거 다 연주하라면 못해요.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음악입니다”라고 했다. /사진가 안웅철
바흐를 염두에 두고 황 명인이 짠 가야금 산조의 정식 이름은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C&L). 황 명인의 스승인 김윤덕 선생이 1946년 정남희(1905~ 1984)에게 배운 47분짜리 가야금 산조를 바탕 삼아 황 명인이 다스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 등 8부분으로 구성한 곡이다. 도입부인 다스름 가락은 정남희 음악이 전해지지 않아 황 명인이 완전히 새로 짰고,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등 여러 대목은 고치거나 보태고 뺐다. 이렇게 해서 보통 가야금 산조의 2배 가까운 70분 분량이 나왔다. 교향곡으로 치면 말러나 브루크너급(級)이다.

황 명인은 지난봄부터 여름에 걸쳐 몇 달간 서초구 양재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에 매달렸다. 한옥 사랑채에서 두서너 벗을 모아놓고 연주하듯,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아담한 공간을 골랐다. 자신의 이름을 딴 가야금 산조 악보는 17년 전에 냈지만, 이 거대한 곡을 녹음한 것은 처음이다. 중학교 때 처음 접한 가야금과 60년 넘게 살아온 황 명인의 예술 인생이 녹아 있는 결정체인 셈이다.

"정남희 선생은 제가 뵐 수가 없었어요. 6·25 때 월북해 버렸거든요. 김윤덕 선생은 정남희 산조가 쌈빡한 가락은 아니지만, 뿌리가 튼튼한 산조라고 말씀하셨어요. 심상건, 김죽파, 함동정월 등 여러 선생님의 산조를 배웠지만, 전 이 산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서울 서초동 스튜디오에서 헤드폰을 끼고 연주하는 황병기 명인. /사진가 안웅철
서울 서초동 스튜디오에서 헤드폰을 끼고 연주하는 황병기 명인. /사진가 안웅철

정남희는 1934년과 1939년 각각 일본 콜럼비아 축음기회사에서 가야금 산조 음반을 남겼다. 황 명인은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갔다가 북한에서 녹음한 정남희 산조 테이프를 구해 참고했다. 이번 음반에는 70분 연주나 감상이 부담스러운 애호가들을 위해, 10분과 15분, 20분으로 축약한 산조곡 3개도 함께 실었다. 황병기류 산조의 주요 가락을 압축한 것이다.

오는 18일부터 서울 청담동 JJ 중정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독일 작가 에버하르트 로스(Ross)는 황 명인의 가야금 팬이다. 이번 전시회 제목도 '산조'로 정했다. 황 명인에게 바치는 헌정 전시라고 한다. 작년 영국 SOAS대에서 민족음악 연구자 앤드루 킬릭이 낸 영문 연구서 '황병기-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 작곡가'도 우리말로 번역돼 나온다. 이래저래 기념할 일이 많다.

황 명인이 한마디 보탰다. "바흐 파르티타나 베토벤 소나타를 감상하듯 음악 자체에 몰두해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일부러 추임새도 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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