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도 무대 선다… 太平舞를 위하여"

입력 : 2013.03.30 00:56

한국 무용의 역사 강선영, 내달 3일 '불멸의 춤' 공연

"공연을 마치고 마지막 박수마저 사라지고 막이 내려오면 눈물이 쏟아진다. 내가 피에로인가. 남을 웃기고 나는 우는가. 그래도 끝까지 했다."

한국 무용의 살아있는 역사인 명가(明嘉) 강선영(姜善泳)의 '불멸의 춤' 공연이 3일 올라간다. 올해 89세인 그도 무대에 선다. 조흥동(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 김근희(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3호 경기검무 보유자), 이현자(태평무 전수 조교) 등 제자 100명이 나와 한국 근대 춤의 시조이자 강선영의 스승인 한성준의 신선무, 장고춤, 태평무 등을 춘다.

내달 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불멸의 춤’ 무대에 서는 태평무의 대가 강선영씨. /강선영춤보존회 제공
내달 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불멸의 춤’ 무대에 서는 태평무의 대가 강선영씨. /강선영춤보존회 제공
1924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강선영은 열두 살 때 한성준이 설립한 조선무용음악연구소에서 춤을 시작했다. 한성준은 "하도 무서워 보기만 해도 손발이 떨리던" 스승이었다. 1944년 결혼한 후 춤은 잊고 살았다. 공무원이던 남편은 외도가 잦았다. 이혼도 안 되고, 무용도 안 되던 답답한 세월이 흘렀다. 궁리 끝에 서대문 근처 언니 친구 이층집을 얻어서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공연으로 돈을 버는 것은 언감생심, 와서 봐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때였다. 공연 때마다 관객의 환호는 대단했으나, 남은 것은 빚이었다. 의상비, 무대장치비에 들어간 빚 독촉을 피해 다락방에 숨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태평무를 빼고는 그를 말할 수 없고, 그를 빼고는 태평무가 있을 수 없다. 풍년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춤인 태평무는 발이 중심이 되는 춤이다. 경쾌하면서도 절도 있게 발을 꺾어야 해서 때로는 걷지 못할 정도로 발목이 욱신거렸다. 그가 태평무를 선보인 곳은 170개국. 횟수로는 1500회가 넘는다. 2006년 한국 전통무용가로는 최초로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올랐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그는 입버릇처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무용가나 예술가는 머릿속에 필름이 많아야 한다. 혼자 다시 돌리며 웃기도 울기도 해야 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강선영 춤 무대의 필름은 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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