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을 디자인하다

입력 : 2013.03.26 03:04   |   수정 : 2013.03.26 10:21

[옷 만들다 무용연출·연극·영화 전방위 진출하는 정구호]
국립무용단 신작 '단' 연출, 안무 외 메이크업·조명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내 영역
"'무용 뭘 아느냐' 말 많았지만 죽을 때까지 도전할 겁니다"

고소득 여성들이 좋아하는 옷 '구호(KUHO)' '르베이지'를 만드는 디자이너 정구호(51·제일모직 전무). 그는 지난해 무용가 안성수(51)가 안무한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포이즈(Poise·균형)'를 연출했다. 좁디좁은 무용계에서 바로 '말'이 나왔다. "디자인이나 잘할 것이지, 무용을 뭘 안다고 덤비느냐", "어디서 굴러와서 이래라저래라냐." 정구호는 대꾸했다. "제가 무대를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걸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의 떡'을 기웃거리며 욕을 많이 먹는 정구호의 생각은 이렇다. "한번 태어나서, 살아봤자 100년도 안 되잖아요. 제가 도전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 여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욕먹어도 좋아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예요. 놀면 뭐 해요."

그가 이번에는 국립무용단의 신작 '단(壇)'을 연출한다. 인간의 신분과 권력을 상징하는 '제단'을 등장시켜 본질적 갈등과 조화를 보여준다. 안무는 이번에도 안성수가 하고, 그는 연출·메이크업·조명 등 '보이는' 모든 것을 맡았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디자이너 정구호<사진 위>. 그가 연출하고 옷을 만든 국립무용단 신작 '단(壇)'의 무용수들. /이태경 기자·국립무용단 제공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난 디자이너 정구호<사진 위>. 그가 연출하고 옷을 만든 국립무용단 신작 '단(壇)'의 무용수들. /이태경 기자·국립무용단 제공

무용 연출 첫 도전작이었던 '포이즈'는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는 듯한 절제된 구성과 안무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만물의 질서를 표현했다. "신선한 시도"라는 평가와 "디자인만 보이고 춤은 없다"는 비판이 엇갈렸다. "관객들로부터 호불호(好不好)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것이 최악이에요. 야단맞는 건 괜찮아요. 새로운 걸 하니까 그럴 수 있죠."

'포이즈'는 두 번째 도전작 '단'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작품을 본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이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정구호에게 연락했다. "우리 극장에서도 이렇게 새로운 거 한번 해봅시다." 옷을 만들던 그가 국립발레단에 이어 국립무용단까지 '접수'하게 된 것이다.

정구호가 무용에 끌린 것은 뉴욕에 체류하던 1993년 즈음. 동갑인 무용가 안은미가 "끝내주는 한국 애가 있다"고 해서 찾아본 공연이 안성수의 무대였다. 모델에게 입히는 옷에 익숙하던 그에게 무용은 '움직이는 옷들'의 세계였다. 첫 무용 의상은 '수류'(1999). 세련된 그의 옷에 무용계도 반색했다. 그가 "무용 전체에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겠다"며 연출도 하겠다고 나서기 전까지는.

그는 무용 외에도 연극('레이디 맥베스'), 영화('정사' '텔미썸씽') 등 시각 예술 장르에 전방위적으로 손을 대왔다. "빨랫비누도 디자인할 수 있다. 보이는 건 모두 저의 영역이다."

끔찍하게 듣기 싫은 말은 '무슨 풍(風)이다', '뭐스럽다'라는 것. "차라리 베꼈다는 게 나아요." 그는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연출가로서 정구호는 파격을 즐긴다. '단'은 한국무용이지만,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나온다. 그는 "음악이든 무대든 깨버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포이즈' 때는 발끝으로 서있기만 해도 힘겨운 발레리나를 회전 무대에서 춤추게 했다. 이번에는 달빛을 상징하는 형광등 200개를 달아서 동작 하나하나 낱낱이 드러나게 만든다. 화장으로 무용수의 눈썹을 지워 얼핏 모든 무용수가 똑같아 보인다. "주인공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보다 전체 군무의 조화를 더 드러내고 싶었어요."

'단' 공연은 장장 5일이나 한다. 길어야 2~3일이 보통인 무용계에서는 극히 이례적이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보여주자"며 안호상 극장장이 밀고 있다. 그 점이 그를 불타게 한다. "좌우 20m 대극장 무대를 단순한 선과 빛으로 꽉 채워 보이겠어요."

▷무용 '단(壇)' 4월 10~14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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