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던지며 싸우고, 상한 수박 먹으며 공연… 결국 성공

입력 : 2012.08.11 03:13   |   수정 : 2012.08.13 10:10

공연 10년 맞은 연극 '한여름'
10년 전엔 단원들조차 외면… 소주잔 던지며 반발하기도… 첫 공연 마쳤더니 기립박수
英·홍콩 등 해외에서도 공연… 잇단 '한국 연극 최초' 기록

"대사해야지 춤춰야지 노래해야지, 감정 연결이 안 되잖아!" 고함과 함께 소주잔이 허공을 갈랐다. 잔은 표적(?)을 빗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던진 이는 극단 여행자의 한 단원이었고, 맞을 뻔한 이는 여행자 대표인 양정웅(44)씨였다. 2002년 7월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이하 '한여름', 연출 양정웅) 첫 공연 일주일 전, 한 술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만 해도 실험적인 형식이었다. 생략과 압축도 많았다. "관객이 이해 못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여섯 명이 "이대론 못 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양씨는 "돌아보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며 "어렵게 설득해 첫 무대에 오른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그 후 10년, '한여름'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연극으로 우뚝 섰다. 초연한 밀양여름공연예술제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대상을 받았고, 2006년 유럽 최대 공연장인 영국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한국 연극 최초로 공연했다. 2007년 아시아 최고 예술축제인 홍콩예술축제 공연, 지난 4월 '셰익스피어의 심장' 런던 글로브극장 공연 등 해외에서 잇단 '최초'의 역사를 써왔다. 지난 1일 재공연에 들어간 '한여름' 배우들을 최근 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나 명품 연극 탄생까지 10년의 뒷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실험적인 작품을?" 초연 단원들 '쿠데타'

'한여름'은 셰익스피어 원작에 도깨비를 등장시키고 사물(四物) 등 한국적 소리를 더한 낭만 희극. 몸짓과 표정 등 연극성을 풍부하게 살려 남녀노소 누구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다. 10년 전 '쿠데타' 주동자 중 한 명인 정해균(도깨비 남편 가비 역)씨는 "첫 공연 오를 때는 창피만 안 당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끝나자마자 객석이 떠나갈 듯 박수가 터져 얼떨떨했다"고 했다.

공연 10주년을 맞은 연극‘한여름 밤의 꿈’배우들이 연출가 양정웅씨(아랫줄 왼쪽에서 둘째)와 함께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공연 10주년을 맞은 연극‘한여름 밤의 꿈’배우들이 연출가 양정웅씨(아랫줄 왼쪽에서 둘째)와 함께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공연 10주년을 맞은 연극‘한여름 밤의 꿈’배우들이 연출가 양정웅씨(아랫줄 왼쪽에서 둘째)와 함께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제까지 '한여름'이 사로잡은 곳은 18개국, 64개 도시, 27개 페스티벌. 배우 김진곤씨(항 역)는 "2008년 인도 첸나이 공연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한여름'은 도깨비불을 상징하는 야광팔찌 수십개를 객석으로 던지는 장면 등 관객 반응이 공연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관객은 서로 팔찌를 받으려고 난리다. 그러나 첸나이 1000석 대극장을 메운 관객 중 누구도 팔찌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김진곤씨는 "1시간30분 공연이 10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나 끝나자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배우들과 사진을 찍으려고 인도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김씨는 "나중에야 '공연에 방해가 안 되도록 조용히 해달라'고 극장 측이 주의를 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의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수백 회 공연엔 실수도 있었다. 바비칸센터 공연 때는 심벌즈가 말썽을 부렸다. '챙~'하는 심벌즈 소리와 함께 암전이 되기 직전, 심벌즈 원반이 무대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단원들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야속한 원반은 무대에 착지해서도 한참을 빙빙 돌았다. 배우 김지연씨(도깨비 아내 돗 역)는 "불 꺼지길 기다리며 원반을 쳐다보던 수초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수박 살 돈 부족해 썩은 줄 알면서도 먹어

공연에서 약초 캐는 할머니 아주미가 수박을 우적우적 먹는 동안, 주술에 빠진 도깨비 남편이 '절세 미녀'라고 치켜세우는 장면은 최고의 웃음 포인트 중 하나. 2003년 여름, 아주미 역의 정하은씨는 썩은 수박을 즐겁게 씹어 먹으며 공연해야 했다. 냉장고가 고장 나 보관했던 수박이 상했기 때문. "당시만 해도 극단 살림이 넉넉지 않아 새로 사달라고 하기가 미안했다"는 정씨는 곰팡이 핀 수박을 맛있다는 듯 먹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공항에서 생긴 사건도 많다. 주로 소품이 문제였다. 2007년 호주로 출국하려는데 거적이 검색대에 걸렸다. "호주는 청정 지역이라 지푸라기는 갖고 갈 수 없다"는 것. 도깨비 남편이 둘러쓰는 거적은 핵심 소품이다. 결국 방역을 따로 하고, 배로 부치는 소동 끝에 호주 반입에 성공했다. 빗소리를 내는 악기인 레인스틱(rain stick)은 검색대를 통과했으나 탑승 직전 저지당했다. 항공사 직원은 "이것은 둔기가 아니냐?"고 했다. 인천공항에서는 병풍이 걸렸다. "문화재 밀반출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공항 직원 앞에서 단원들은 병풍을 집어던지고 발로 밟으며 "아무 데서나 파는 흔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대표 양정웅씨는 "관객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어떤 고생도 잊을 수 있다"며 "2시간 동안 극장에서 고단한 현실을 잊을 수 있도록 꾸준히 '한여름'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한여름'은 여행자의 다른 작품 '십이야'와 함께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문의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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