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 소프라노 전성시대

입력 : 2012.05.24 03:08

노래는 기본, 재색겸비 - 모든 것 잘해야 살아남는다
대형 음반사와 오페라 극장 가수 키우듯 성악가 키워… 외모 지상주의 비판도 나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1853년 초연 때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주인공 역에 뚱뚱한 소프라노를 기용했다. 전설의 프리마돈나 몽세라 카바예와 제시 노먼은 육중한 체구에도 아름다운 목소리만으로 오페라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동안 오페라에서 '비주얼'은 그리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안젤라 게오르규(루마니아)와 2000년대 안나 네트렙코(러시아)를 필두로 최근 파트리샤 프티봉(프랑스)과 다니엘 드니즈(호주), 모이차 에르트만(독일)까지 그야말로 '재색겸비(才色兼備)'형 소프라노의 전성시대다. "클래식 음악계마저 외모 지상주의에 물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노래만 잘해선 안 된다"

음반으로 오페라를 즐겼던 20세기에는 연기력이 떨어지거나 레퍼토리가 넓지 않아도 타고난 목소리만으로 최정상의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DVD 영상물과 인터넷 동영상으로 노래와 발성, 연기까지 실시간으로 검증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외모와 연기력 비중이 높아졌다. 90년대 동구권 붕괴 이후 구(舊)공산권에서 탄탄한 연기 수업을 받은 성악가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만능 성악가'에 대한 수요도 더불어 커졌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씨는 "과거에는 노래만 잘 부르면 설령 연기력이 떨어져도 넘어갔다면, 지금은 모든 걸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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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상승에서 벼락출세로

성악가들이 지역 오페라극장에서 경력을 쌓고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계단식 구조'가 무너진 것도 원인이다. 20세기 전설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는 1942년 모국 그리스에서 데뷔했지만 1949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극장과 1952년 영국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 설 때까지 수년씩 걸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계무대로 직행한 뒤 거꾸로 자국에 '역수입'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독일 출신의 소프라노 에르트만은 200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차이데'에서 주역을 맡으며 곧바로 세계무대로 진출했다. 다음 달 첫 내한 독창회를 갖는 에르트만은 전화 인터뷰에서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전곡을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에 응모해서 합격한 뒤 1년간 준비했다"고 말했다.

◇대형 음반사·오페라극장이 진원지

미녀 소프라노의 전성시대를 주도하는 진원지는 대형 음반사와 메이저 오페라극장. 지난해 음반사 유니버설뮤직은 공연 기획사 CSAM(센터 스테이지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을 설립하고 네트렙코와 에르트만 등을 영입했다. 마치 대중음악 기획사처럼 성악가 발굴과 음반 발매까지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면서 성악가를 키우고,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세우는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음악 평론가 장일범씨는 "성악가의 잠재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효과도 있지만 반대로 빨리 소비하고 용도 폐기하는 상업화의 우려도 크다"고 말했다.

◇바로크·현대음악 등 전공도 다양

20세기의 명(名)소프라노들이 대개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다면, 21세기의 디바(diva)는 바로크와 현대음악으로 영역을 세분화하고 있다. 호주 출신의 소프라노 드니즈는 지난 2005년 영국의 글라인드본 오페라 축제에서 헨델의 '줄리오 체사레'에 출연하며 명성을 얻은 뒤 몬테베르디, 모차르트 등 바로크와 고전 오페라로 특화했다. 거꾸로 프랑스 바로크 음악으로 인기를 얻은 프티봉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데뷔한 에르트만은 최근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룰루'에서 주역을 맡으며 현대음악으로 반경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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