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유럽… 음악계 먹구름

입력 : 2012.04.04 23:21

[클래식 종주국 위치 흔들]
예산·후원금 등 삭감에 경영난… 스페인 리세우 극장 임시 휴관
伊 라 스칼라도 101억원 적자, 교향악단도 해고·구조조정

2006년 스페인 리세우 극장에서 공연됐던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보체크’. /오푸스 아르테 제공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명문 오페라 극장인 리세우 극장은 올 시즌 예정됐던 공연 12편을 오는 24일부터 취소하고 임시 휴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100만유로(약 165억원)에 이르는 예산과 후원금이 삭감되면서 370만유로(약 55억원)의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간 것이다. 오페라와 발레, 독창회 등 사실상 모든 장르의 공연이 취소되면서, 합창단원을 비롯해 극장 직원 395명도 일시 휴직에 들어갔다.

유럽 경제 위기의 먹구름이 '클래식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유럽 음악계를 암울하게 뒤덮고 있다. 1847년 개관한 리세우 극장은 유럽 전역에서 지휘자와 성악가, 연출가를 초청하고 화제작을 쏟아내면서 유럽 오페라의 신흥 명문으로 꼽혔다. 특히 베이스 연광철이 출연했던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와 테너 롤란도 비야손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마스네의 '마농' 등 인기 공연들은 영상물(DVD)로 제작되면서 '영상 시대의 강자'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 재정 적자의 직격탄을 피하지 못하고 공연 중단이라는 치욕을 맞은 것이다. 후안 프란체스코 마르코 극장 총감독은 "공연을 중단하게 되어 애석하지만, 예술적 수준을 낮추고 강행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종갓집'으로 불리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역시 정부 보조금 삭감으로 적자만 900만달러(101억원)에 이른다. 당초 오는 9월부터는 새로운 프로덕션을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일었지만, 이탈리아 명품 기업인 토즈(Tod's)가 520만유로(77억원)를 긴급 지원하면서 겨우 숨통이 트였다.

유럽 경제 위기의 암운(暗雲)은 비단 남유럽에만 그치지 않는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왕립 오페라 극장은 최근 예술감독과 음악감독이 동시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덴마크 정부는 향후 4년간 1억크로네(190억원)의 예산을 삭감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이에 따라 극장 100여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상황에 부닥쳤다. 이에 대해 예술 감독인 키스 워너와 음악 감독 내정자인 지휘자 야쿠프 흐루샤가 항의하면서 사임 의사를 밝힌 것이다.

2005년 새롭게 문을 연 덴마크의 코펜하겐 오페라 하우스. 신흥 오페라 명가로 떠올랐지만, 유럽 경제 위기로 정부 예산이 삭감되자 예술 감독과 음악 감독 내정자가 동시에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진은 먹구름과 번개 치는 장면을 합성한 것. /코펜하겐 오페라 하우스
2005년 새롭게 문을 연 덴마크의 코펜하겐 오페라 하우스. 신흥 오페라 명가로 떠올랐지만, 유럽 경제 위기로 정부 예산이 삭감되자 예술 감독과 음악 감독 내정자가 동시에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진은 먹구름과 번개 치는 장면을 합성한 것. /코펜하겐 오페라 하우스

영국 출신의 워너는 지난해 7월 임기를 시작해서 1년도 못 채웠지만 "'모나리자'를 칼로 긋는 것과도 같은 문화적 야만주의"라며 반발했다. 체코 출신의 지휘자 흐루샤도 내년에 정식 취임할 예정이었지만 취임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지도력 공백'마저 우려되고 있다. 코펜하겐 오페라 극장은 2005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당시 둘러본 뒤, 노들섬 오페라의 벤치마킹 모델로 삼겠다고 밝혔던 극장이기도 하다.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을 제치고 세계 정상의 악단에 올랐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2008년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 조사)를 배출한 '음악 강국' 네덜란드도 오케스트라 구조조정 논란에 휩싸였다. 내년부터 정부 문화 예산이 25%(3000억원) 가까이 삭감되는 반면, 공연 티켓에 붙는 부가세는 6%에서 19%로 치솟으면서 악단도 처절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와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 등 정상급 단체는 5% 안팎의 소폭 예산 삭감에 그쳤지만, 10여 개에 이르는 네덜란드의 다른 교향악단은 단원 해고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들어갔다. 특히 정부 의존도가 높은 소규모 예술단이나 전위적인 실험 단체들의 타격이 클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얀 라스 행정감독은 "문화적 전통을 가꾸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망가뜨리는 데는 잠깐이면 충분하다"면서 우려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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