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곁에 검은 돈 어른거린다

입력 : 2011.03.24 01:06

오리온 비자금 의혹으로 본 '재벌과 갤러리의 관계'

재벌가 여성·화랑대표 커넥션…
돈되는 그림 원하는 안주인 안목높은 여성 畵商과 친분
화랑대표는 VIP 관리하려 김장부터 인테리어까지… 재벌가 '집사 역할'도 해

왜 그림인가…
10억짜리 작품 샀어도 1억에 샀다고 해도 그만… 증여·상속때 과세 어려워
국제시장서 잘 팔리는 값비싼 해외작품 선호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는 오리온 그룹이 서미갤러리(대표 홍송원)를 통해 비자금 40억원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 22일 홍 대표의 자택과 오리온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당시 차장)이 지난 2007년 그림을 받고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했다는 혐의를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역시 3월 초 서울 강북의 서미갤러리와 강남의 서미앤투스를 압수수색했고 현재도 수사 중이다. 수사가 시작된 2009년 "그림(최욱경 작 '학동마을')을 본 적이 없다"던 한씨측이 지난 2월 "당시 부하직원에게 지시해 서미갤러리에서 500만원을 주고 샀다"고 진술을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삼성비자금 사건 특검 때는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행복한 눈물'이 삼성 소유인지를 두고 수사가 벌어졌다. 그림은 서미갤러리 소유로 결론났지만, 이후 '화랑이 재벌 비자금 세탁처'라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세 사건 모두 서미갤러리가 연관돼 있다. 미술작품이 탈세, 로비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2008년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용도로 의심받았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행복한 눈물’.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2008년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용도로 의심받았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행복한 눈물’.
◆탈세, 로비에 왜 미술품 이용되나

미술품이 비자금 조성이나 로비에 쓰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에는 정가(定價)가 없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A씨는 "10억짜리 그림을 샀어도 1억에 샀다고 하면 그만이고, 재산신고 때 누락시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최욱경 '학동마을'… 한상률 전(前) 국세청장이 인사청탁 로비 용도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최욱경의‘학동마을’.
최욱경 '학동마을'… 한상률 전(前) 국세청장이 인사청탁 로비 용도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최욱경의‘학동마을’.
불법증여·상속에도 자주 쓰인다. 정부는 2013년 이후 작품가액 6000만원 이상인 작고 작가의 작품을 팔아 이익이 남으면 세금을 매기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부담이 없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50억원짜리 부동산을 상속하려면 세금 문제가 복잡하지만 그림은 소유 확인 및 가격 평가가 어려워 현실적으로 과세가 힘들다. 작품 하나 넘겨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국제시장에서 환금성이 있는 고가 작품이 선호된다. 국내 작품은 경매 최고가가 45억2000만원(박수근의 '빨래터')이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수백억을 넘는 작품도 허다하다. 삼성가 비자금 조성용도로 의심받았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2008년 삼성특검 당시 200억원대로 추정됐다.

비자금 통로 의혹 '서미갤러리'… 삼성 비자금·한상률 로비·오리온 비자금 사건과 관련됐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서미갤러리.
비자금 통로 의혹 '서미갤러리'… 삼성 비자금·한상률 로비·오리온 비자금 사건과 관련됐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서미갤러리.
◆재벌가 여성과 여성 화랑주인들

1980~90년대 재벌 컬렉터가 선호한 화랑은 H, G, K 화랑 등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동 출신' 화랑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40~50대 여성이 운영하는 몇몇 화랑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미술계에서는 여성 화상(畵商)과 재벌가 여성의 '끈끈한 관계'에서 이유를 찾는다.

미술계 관계자는 "재벌가 여성을 잡기 위해 화랑은 그림매매는 물론 '집사' 혹은 '퍼스널 쇼퍼(개인구매대행)' 역을 자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여성 화상(畵商)을 두고 미술계에서는 "한 재벌 집에서 겨울에 고무장갑 끼고 김장까지 해주며 신뢰를 받기 시작, 자녀 혼수 문제를 맡아서 하는 '집사' 수준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재벌가의 신임을 얻으려면, 투자할 만한 작품을 골라내는 '감식안'과 해외 인맥은 물론, 외국 부자들의 최신 옷, 음식, 인테리어, 레저 정보까지 입수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할 정도.

화랑들이 집사를 자처하는 것은 '재벌'을 잡으면 화랑 매출과 이미지가 수직상승하기 때문이다. 화랑가에서는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서미갤러리가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얘기한다. '삼성이 그림 사는 갤러리'라는 이미지가 상류층에선 '훈장'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다른 재벌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삼성 따라 하기'를 시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고, 다른 이는 "실제로 지방 부자까지 서미에 와서 작품 사려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화→서양화→가구로 로비

미술작품에 식상한 VIP를 겨냥, 고가의 가구들이 로비 수단으로 떠오르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조지 나카시마, 레이 임스 등 세계적 작가의 가구는 탁자 하나에 억대가 넘어가고, 의자 하나가 수천만원인 경우도 있다. "부피가 커서 신경을 많이 쓴 듯한 인상을 받는다"는 게 '가구 로비'가 성행하는 이유다. 외국가구를 취급하는 김모씨는 "함께 매장을 둘러보면서 상대방의 취향을 파악한 뒤 나중에 따로 구입해 상대방 집으로 배달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전형적인 로비의 경우"라고 말했다. 서미의 경우, 자매갤러리에서 고급 가구를 판매해 돌풍을 일으켰다.

기업 CEO들의 사무실 개조 열풍도 의혹을 받고 있다. 재벌가 안주인이 남편에게 특정 갤러리를 추천, 법인 비용으로 수억원을 들여 사무실을 개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상대 그림 장사로는 한계에 이른 화상들이 새 미끼로 '법인' 돈을 겨냥하고 있는 것. 한 화랑계 인사는 "정말 몇몇 화랑 사례일 뿐인데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화랑계 전체가 도매금으로 매도당해 곤혹스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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